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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로나이 Jun 30. 2022

맑은 영혼을 갖는다는 것

김지수,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에서 

"... 필록테테스는 영혼이 죽지 않았어. 오히려 더 강렬해졌지. '나 아파. 나 상처 입었어. 나 외로워'라고 외치는 자기 모습을 객관화해서 바라보았지. 끝없이 아파하는 자기와 그것을 바라보는 자기. 그 자기와의 싸움 속에서 맑은 영혼을 갖게 된 거야. 활을 잡게 되는 거지. '바라보는 나' 그게 자의식이고 자아라는 거야...." 



자의식, 자아, 바라보는 나... 우리는 '나'를 어떻게 인식할 수 있을까?

대부분이 내가 하는 '생각'과 나를 동일시할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데카르트의 명제처럼. 

하지만 단지 '생각하는 존재'라고 받아들이기에는 부족하게 느껴진다. 이런 의문을 제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현상에 대해 여러 가지 관점의 생각을 동시에 하는 경우. 간단한 예를 들어, 어떤 소망에 대해서 '다 잘 될 거야'라는 긍정의 목소리와 '그게 될 턱이 있나.' 혹은 '잘 안 되면 어떡하지?' 하는 부정의 목소리가 동시에 들리는 경우가 다반사이기에, 어떤 생각을 하는 존재가 진짜 나일까 헷갈리곤 한다. 

이어령 선생님의 위 문장은 힌트처럼 다가왔다. 진짜 나는 결국 '바라보는 나'구나. 내 안의 긍정적 생각과 부정적 생각이 공존한다는 그 자체를 인식하는 것, 그 인지력이 결국 진짜 내가 아닐까? 나의 생각과 감정들을 인지하는 존재가 바로 진짜 나, 즉 영혼이요, 참나요, 진아가 아닐까? (나의 생각과 감정을 인지하는 훈련이 바로 명상이다. 그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나아가서는 이러한 의문이 남는다. '그렇다면 공존하는 긍정과 부정의 생각 중에 어떤 것이 진짜인가?'  위 문장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긍정의 생각을 취하는 것이 의식의 기술이요, 삶을 평온으로 이끄는 비결"이라는 말씀. 하지만 무턱대고 긍정을 취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매 순간 긍정을 취한다는 건 오직 신만이 가능한 일이라고 할 만큼 어려운 일이다. 우리가 흔히 아는 신, 예수님이나 부처님만이 가능할 법한 거대한 사랑의 힘이 작용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거리에 노숙자를 보고 '피하자'는 인성의 목소리와 '안타깝다. 돕고 싶다'는 신성의 목소리가 공존할 때, 신성의 목소리를 행동으로 옮기는 일은 예수님이나 부처님 만큼의 순수 의식, 혹은 궁극의 사랑을 지녀야 가능하다는 의미다.  

성숙한 삶이란 내 안의 긍정과 부정 중에 긍정을 믿고 나아가려는 의지를 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수행적 태도가 아닐까? 내면에 공존하는 신성과 인성을 알아차리고, 인성의 목소리 대신 신성의 목소리를 취하면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맑은 영혼을 갖게 되는 것이요, 활을 잡게 되는 것'이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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