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성장시키는 문장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싸운다. 알은 새의 세계이다.
태어나려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청소년기에 헤르만 헤세의 책을 읽고, 어렴풋이 ‘좀 더 어른이 된 것 같다’고 느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최근에 우연히 이 책을 다시 읽게 됐는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이 나의 내면에 구도심의 씨앗을 심어주었던 거겠구나!’ 내가 의식하지는 못했지만, 큰 영향을 받았음이 틀림없다는 알아차림에 몸을 떨었다.
그 당시에는 내가 이 책을 얼마나 이해하면서 읽었는지는 모르겠다. 물론 지금도 모두 이해한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어른이 된 지금 다시 접한 이 책은 흔히 이야기하는 ‘성장 소설’이라기보다는 그 이상의 ‘영성에 눈뜨는 여정’으로 읽혔다.
책 속의 화자인 싱클레어가 겪는 혼란과 각성은 단순히 사춘기의 통과의례가 아니라, ‘자기 안의 신성’을 찾아가는 과정과 닮아 있다. 선과 악의 경계를 넘어서고, 사회가 정한 도덕의 틀을 의심하면서, 결국 ‘신은 인간 안에 있다’는 깨달음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관점은 오늘날 영성가들이 말하는 내면의 신성 인식— 즉, 영성의 본질이 아닌가. 우리는 인간의 에고적 세계를 초월해 내면의 신성한 빛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책 속엔 이런 메시지가 관통한다. ‘진정한 선이란, 자신에게 진실한 것.’
지금으로부터 1백여 년 전, 헤르만 헤세의 이러한 정신은 상당히 파격적이었을 것 같다. 당시 유럽은 기독교적 세계관이 사회 전반을 지배하던 시대였으니까. 신은 절대적이고, 임간은 그 앞에서 죄 많고 불완전한 존재로 인식되던 때, ‘신은 인간 안에 있다’는 작가의 신념은 반항처럼 느껴졌을 거다.
실제로 헤세는 당시 종교계뿐 아니라 보수적인 문단에서도 꽤 비판을 받았다고 한다. 〈데미안〉이 발표된 1919년, 특히 종교계에서 반발이 거셌다. 그가 “신은 인간 안에 있다”라고 썼을 때, 기독교 신학자들은 그걸 범신론(pantheism)이나 이단적 신비주의로 치부했다. 특히 “선과 악은 둘이 아니라, 하나의 전체 안에서 공존한다”는 구절은 도덕적 질서를 무너뜨리는 발언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당시 몇몇 문학 평론가들은 그를 ‘신비주의적 퇴폐 작가’, ‘도덕의 적’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데미안〉은 젊은 세대들의 전폭적 지지를 받았다. 종교를 거부한 게 아니라, 신을 다시 ‘살아있는 감각’으로 되돌린 것이라는 걸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었나! 과거의 헤세는 시대의 적이었지만, 오늘날엔 내면의 해방자로 기억되고 있다.
한 세기가 지난 지금도, 여전히 ‘내면의 신성’을 불편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신을 교리나 제도에서 꺼내, 인간의 경험 속으로 되돌린 사상가이자 내면의 해방자가 쓴 이야기를 더 많은 어른들이 읽어보면 좋겠다.
자신 안의 신성을 찾는 저마다의 여정을 응원하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