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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비 Jun 07. 2024

넓고도 좁은 일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괴리

나는 집에서 일하는 프리랜서다.

영문과를 나오고 집에 80년대 당시에는 귀한 맥 컴퓨터를 가지고 있던 덕분에 Apple 관련 회사에서 번역일로 직장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때마침 불던 IT 바람과 한국의 입지 상승에 힘입어 Adobe, Microsoft, Apple, IBM 등 온갖 미국 IT 제품의 한글 버전이 출시되는 시장의 IT Localization이라는 분야에 자연스럽게 몸 담게 되었고, 결국 평생 하는 직업이 되었다.


외국기업 직장을 관두고, 미국에 와서는 기존의 Localization PM(Project Manager) 역할 대신 IT 관련 각종 초벌 번역을 '교정(Review)'하거나 '품질 평가(QA)'하는 일을 여태껏 하고 있다. 둘째가 2살 되던 해부터 다시 일을 시작했으니, 모든 경력을 합치면 25년이 넘어간다. 직장 다닐 때는 매니저다 보니 나름 수입이 괜찮았는데, 지금은 '갑을병'의 고객사를 거쳐 일개 '정'에 해당하는 처지에다가 요즘에는 Machine Translation의 위협까지 합쳐져 경력에 비해 사실 수입은 그리 많지 않다. 물론 일하는 만큼 버는 프리랜서이기도 하고, 일 자체를 애들 어릴 때부터 집에서 하다 보니 식구들 건사하는 짬짬이 하는 부업 같다고나 할까... 자조하는 말로, '인형 눈 꿰는 일' 같은 걸 하고 있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말한다.


일하는 회사가 시애틀에 있는데,

각종 계정의 일들이 미중부, 서부, 하와이, 한국 등등에 있는 번역사들에게 나간다.

그 번역사들은 유럽과 미국에 있는 서버에 접속해 작업을 하고,

번역이 끝나면 동부에 있는 내게 리뷰 요청이 온다.

또는 세계 각국에서 한 파일에 접속해 각 나라의 최종본에 있는 오류를 기록 및 평가하기도 하면서,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사람들과 각기 다른 시간대를 넘나들며 일한다.


하지만,

그 모든 일은

내 책상에서

늘 가장 편한 추리닝 내지 반바지 차림으로

단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고 이루어진다.

거의 모든 일이 메시지와 메일과 각종 관련 프로그램들로만 이루어지니

10년 가까이 합을 맞춰 '어'하면 '아'할 정도로 손발이 잘 맞는 담당 팀장의 목소리도 모른다.


처음 Apple 관련 직장에 다녔을 때,

옆 직원이 어느 날 흥분해서 말했었다.

"있잖아, World Wide Web이란 게 나왔대. 세계가 다 통신하고 연결될 거래." 했었는데,

그 덕분에 여태껏 미국 시골에서 날마다 세계 곳곳에서 파일에 접속하고 주고받는 일을,

정작 집에 갇혀 꼼짝도 않고 침묵 속에서

아무도 만나지 않고 일하는 이 아이러니란.


세계 어느 곳에서든 통신망과 랩탑만 있으면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또 그 기술의 발전 때문에 언젠가 AI의 Machine Translation에 밀려

사라질 수도 있는 직종인 이 어두운 전망의 일을

오늘도 나는 '배운 게 도둑질'뿐이라

어김없이 책상에 앉아 눈이 빠지게 모니터를 쳐다보고 있다.


#지병으로_눈다래끼랑_허리디스크는_덤

#글노동자

#역마_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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