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센터에 처음 입사하면 신입 교육을 받는다. 콜을 받기 전에 회사 업무에 유능한 강사님들과 함께 한다. 패기 넘치고 꿈 많았던 신입시절에는 교육을 받으면서 앞에 있는 강사님이 되고 싶었다. 열심히 콜을 받고 실적을 높여 인정받아 관리자가 되고 싶었다.
어떤 회사든 학교든 사회에서는 눈에 보이는 숫자가 중요하다. 실적과 성적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중 콜센터에서는 콜수가 단연 최고다. 가장 많이 콜을 받고 정확하게 처리하는 사람의 실적이 가장 좋다.
나는 좋게 말하면 친절 상담, 나쁘게 말하면 오지랖 상담으로 인해 콜 수는 항상 맨 아래였다. 고쳐지지 않는 나의 성격으로 상담은 항상 길어지고 실적은 잘 나오지 않았다. 저조한 실적 때문에 회사에서 눈치 보이고 고객한테 시달리고 나는 나대로 지쳐갔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나에게 기회가 왔다. 경기도에 새로운 센터가 생기는데 그곳으로 가면 부팀장을 시켜주겠다는 것이다. 서울에 사는 나에게는 출퇴근 시간이 엄청나게 늘어나지만 강사가 될 수 있다면 꼭 가고 싶었다. 보통 강사나 팀장을 지원하기 전에 부팀장을 하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단계였다.
워낙 나서는 걸 좋아하지 않고 내성적인 성격이라 팀원들과 잘 지낼 수 있을까 걱정했다. 다행히 친절 상담이 신입 교육으로 이어져 나를 따르는 팀원들이 많이 생겼다. 학교 다닐 때보다 회사 업무지식 공부를 더 많이 한 덕분에 그들의 질문에 막힘없이 답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몇 사람들은 나에 대해서 안 좋은 이야기를 하고 다녔다. 내가 신경 썼던 팀원이라 상처는 더 컸다. 사람 좋아하는데 이유 없듯이 사람 싫어하는데 이유 없을 거라 생각하고 신경 쓰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신생 센터라 그런지 신입들보다 경력자들이 훨씬 적었다. 그래서 나는 팀장, 강사 대행 업무까지 했는데 해보지 않았던 업무라 부담감과 어려움이 컸다. 그럴 때마다 상급자들은 관리자 자리가 생기면 바로 지원할 수 있게 해 준다는 이야기로 나를 달래주었다. 하지만 1년간 퇴사하는 관리자가 없었고 오히려 인원 감축으로 관리자들이 조직을 변경하기도 했다.
내가 관리자가 되지 못한 것은 회사의 잘못도 아니고 나의 잘못도 아니지만 내가 다 소화하지 못한 업무들은 나에게 병이 되어 돌아왔다. 자궁경부암이었다. 그것도 27살에! 암이라고 하니 그게 크던 작던 세상 다 산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굉장히 억울하다. 나는 열심히 살았는데 왜 하필 나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나는 치료에서 끝났지만 마음에 상처는 치료하지 못했다. 번아웃이 오고 공황까지 왔었다. 이제 정말 가슴에 품은 사직서를 꺼내놔야 생각했는데 센터장님이 부서이동을 제안하셨다. 내가 현재 있는 부서이기도 한데 일단 콜을 안 받는다. 전산 처리만 하는 부서로 나한테 주어진 일만 처리하면 된다.
단, 부팀장을 그만둬야 하며 관리자 지원의 기회는 없어진다. 특수부서로 가는 거니 당연한 일이지만 회사에서 품어왔던 나의 꿈이 무너지는 거 같았다. 마음도 무너졌지만 무너진 몸을 먼저 일으켜야 했기 때문에 일단 특수부서로 왔다.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내가 부서를 옮기자마자 관리자 지원 공고가 나왔다. 이젠 내가 가르쳤던 신입들이 팀장님, 강사님이 되었다. 기분이 참 이상했다. 2년 전만 해도 그들과 나의 입장은 반대였는데 내가 부끄럽고 운이 없는 사람이라고 자책하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고 생각해보니 지금 나의 업무는 나와 잘 맞는다. 과거 아무리 친한 사람이어도 사람을 상대하다 보면 지치는 내 성격에 하루 종일 콜 받는 건 정말 스트레스였다. 이곳은 오늘 받은 일을 다 처리하면 조금의 여유를 느낄 수 있다. 반복 작업이다 보니 익숙해져서 업무 속도가 굉장히 빨라졌다. 주변에서 정확하고 빠르게 처리한다고 인정하니 기분이 좋다. 다시 회사에서의 자존감이 높아지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의 시간을 조절해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 시간들은 자연스럽게 글쓰기로 이어졌다.
남과 절대 비교하지 말고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남들보다 조금 느려도 언젠가는 도착할 것이니 조급해할 필요도 없다.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진심으로 대한다면 그 안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