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있어요
'요즘 공부는 잘 돼 가니 ? 취업은 언제 할 거니? 너 부모님 등골 그만 빼먹어야 된다.'
우리 집에 가끔씩 찾아와 집에 있는 나를 보고는 친척들이 나에게 던지고 가는 말이다. 그렇게 말 안 해줘도 잘 알고 있다. 내가 우리 부모님의 등골을 아주 쪽쪽 빨아 먹고 있다는 걸. 그리고 저렇게 묻지 않아도 나야말로 취업하고 싶어 죽을 것 같다.
KBS단막극 <노량진 역에는 기차가 서지 않는다>. 공시생인 희준(봉태규)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4년 째 공시 준비를 하고 있는 장수생인 희준은 부모님에게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고자, 남들만큼만 살라는 아버지의 말씀을 따르고자 노량진에서 공시생활을 한다. 33살의 이미 먹을 대로 먹은 나이는, 희준이 부모님에게 더 이상 손 벌릴 수 없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다. 학원 실장의 '주제 파악 좀 해라, 너 평생 그 꼬라지로 살래.' 라며 자존심을 짓뭉개도 그저 고개를 숙이며 학원 보조로서 공짜로 학원을 다녀야 한다. 공부할 시간도 촉박한데 희준은 수산시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해야만 하고, 잠깐의 쉬는 시간도 용납 않고 밥 먹는 시간도 아까워 컵밥으로 떼우기 일쑤다. 이 때 희준의 삶에 나타난 한줄기 단비 같은 여자가 바로 유하다. 전직 체조선수였다던 유하는 금메달을 따고 은퇴했다고 한다. 그리고 아빠를 위해 사진을 남겨야 하는데, 좀 도와 달란다. 그녀를 도와주며 희준은 점점 합격만이 목적이었던 삶에 다른 목표를 갖고 살고자 한다. 그러나 현실은 현실. 어머니의 간절한 전화와 아버지의 말씀 '남들만큼만 살자.' 희준은 유하가 주는 꿈같은 달콤함에서 벗어나 두 달 남은 시험에 모든
것을 바친다.
희준은 결국 합격한다. 그리고 유하는 암에 걸려 죽는다. 그제서야 유하의 모든 것이 이해되기 시작한다. 왜 그렇게 현재를 즐기며 살라고, 한시가 바쁜 공시생에게 Carpe Diem을 외쳐 댔는지. 그런데 사실 이 단막극을 보며 내게 와 닿았던 사람은 희준도 아니고 유하도 아니다. 난 죽을 병에 걸리지도 않았고, 아직 합격하지도 않았으니까. 희준의 친한 동생으로 나오는 윤철이 오히려 나에게는 더 와 닿았다. 적당히 뒷받침 해 줄 수 있는 부모님이 있고, 불안해 죽겠지만 티내지 않는. 결국엔 불합격 해버리고 마는 그가 안쓰러웠다. 지금의 나도 그러니까. 남들은 그럴지도 모르겠다. 배부른 소리 한다고. 부모님은 취업 언제하냐며 날 쪼으지도 않고 당장 돈이 없어서 아르바이트에 발이 묶여 있지도 않다. 그런데 정말 불안하다. 하루에도 수 십 번씩 감정의 폭이 널뛰고 당장이라도 눈물을 펑펑 쏟을 수 있을 정도로. 마지막에 그는 말한다. 겁이 난다고. 다른 사람들은 다 떠나는데, 자기만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묶여 버릴까봐.
희준과 유하, 윤철 세 사람은 각자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성공한 사람과 실패한 사람으로 나누든 말든, 살아가는 것이다. '금메달 못 땄다고, 합격 못 했다고 해서 그 동안 아무것도 안 한 건 아니잖아.' 라고 말해주는 유하가 고맙다. 어제만 해도 신문을 읽고 글을 쓰는 지금의 내가 쓸모 없어질 것을 걱정했기 때문이다. 결과물을 내지 않은 나 자신을 한심하게 생각할 뻔 했다.
내가 과연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지금 이렇게 사는 것이 맞는 건가, 공부만 한다고 내가 뭐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지금, 같이 울고 공감할 수 있는, 한 시간 분량의 작은 쉼을 가지게 하는 단막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