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에 '조용한 희망(Maid)'이라는 시리즈가 있다.
가정 폭력을 당한 여주인공 알렉스가 겪는 이야기다.
그녀에겐 3살 딸아이 매디가 있고, 그녀는 딸을 지키고 싶어 한다.
술 취한 남편에게 위협을 당하고도
그녀는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래서 남편 숀이 아이를 내놓으라고 제기한 법정 다툼에서 그만 딸아이를 잃게 된다.
보면서 많은 장면이 마음에 와닿았다.
'저렇게 그냥 넘어가면 나중에 곤란할 텐데?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경찰에 신고하지.'
하지만 이야기란 무릇 주인공이 역경을 겪을수록 드라마틱 해지니, 일개 시청자로서 어쩔 도리가 없다.
그러던 그녀는 어느 날 남편이 딸을 시어머니에게 맡겨둔 채 꼬박 이틀을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녀는 남편의 비밀 장소를 알고 있다.
역시 거기에 남편 차가 주차되어 있었고, 그는 마약에 찌들어 저 먼 강물을 바라보며 앉아있었다.
아이를 빼앗은 걸로도 모자라 얼굴마저 보여주지 않는 그가 도대체 뭐가 예뻐서 도와주러 간 건지 모르겠지만,
TV 속 주인공은 그랬다.
"차 열쇠 줘. 집까지 데려다줄게."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그가 그녀를 바라보며 넌지시 물었다.
"왜 이제 날 안 좋아해?"
"네가 변호사를 써서 판사한테 애를 빼앗기도록 만들었잖아."
"아니, 그전에.
오래전부터 날 그만 좋아했어."
그리고 그는 뜻을 알 수 없는 멋쩍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여기에 대한 알렉스의 대답이 명언이었다.
"취했을 때 데리러 올 만큼은 좋아하는데."
"왜지?"
"매디의 아빠니까."
새로 만난 그와 무엇보다 각자의 지난 결혼 생활에 대해 많이 이야기한다.
그도 전 부인과 시험관 시술을 시도했었다고 했다. 다만 완전히 성공하지는 못하고 한 번 착상했다 유산했다고.
과거의 결혼 생활을 얘기하다 보면 누구나 어쩔 수 없이 푸념을 하게 된다.
"한 번은 집안에 중요한 행사가 있었어. 그래서 와이프 혼자 산부인과를 혼자 갔는데, 그게 그렇게 서운하다고 하는 거야."
시험관 시술을 준비하다 보면 배에 매일 주사기로 호르몬제를 맞아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과배란 시킨 난자를 채취한 다음 체외에서 정자와 수정을 시킨다. 그 후 다시 산모의 자궁에 착상을 시도해 성공하면 임신이다.
"수정란 채취하는 날? 그 수면 마취하고 하는 날?"
수정란 채취는 수술과도 같아서 보호자가 꼭 필요하다.
"아니 아니. 그날 말고, 다른 날이었던 것 같아."
다른 날이었던 것 ‘같다’니.
"어... 그날 아니라면 혼자 갈 수도 있지.."
라며 말로는 그의 편을 들었지만
생각해보니 나는 단 한 번도 그런 일로 서운했던 적이 없다.
"근데 오빠, 생각해보니 나는 한 번도 산부인과를 혼자 간 적이 없어."
선을 보고 한 달만에 결정한 결혼이었다고 했다.
신혼 때 둘이 집에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고 했다.
"같이 있어서 좋았겠다."
"아니, 딱히 그렇지도 않았어."
어쩌면 그는 그녀를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결혼했던 걸까.
1년여간 난임 병원을 다니며
어쩌면 평생 엄마가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참으로 두렵고 울기도 많이 했었다.
그러다 기적처럼 쌍둥이를 임신했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땐 이 세상 누구도 부럽지 않았다.
그리고 임신과 함께
나는 남편에게 그전보다 더 귀한 사람으로 대접 받았다.
편도 1시간이 넘는 러시아워의 출근길을
왔다가 꼬박 온 길을 돌아가야 하는데도
아침마다 지각을 감수하고 데려다주었다.
딱 방학하기 직전 이맘 때였을 거다.
전날 눈이 소복히 내려 쌓인 출근길에
꼭 과일 주스를 먹겠다고
자꾸 미끄러지는 차를 골목길에 조심히 대고 함께 총총 걸어가던 그 길 어스름한 아침 빛을 여전히 기억한다.
수술뿐 아니라 매 달 정기검진 때도
한 번도 지하철을 타고 병원에 간 적이 없다. 늘 그가 차로 동행했기 때문에.
초음파를 찍고 기본적인 혈압과 몸무게를 체크하며
내가 여전히 건강하다는 사실에, 그리고 두 아이가 쌍둥이임에도 불구하고 주 수에 맞게 잘 크고 있는 데 감사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왕절개 수술 후 침대에서 한 발 짝도 움직이지 못하는 나를 위해
좁은 욕실에서 손님용 의자를 이리저리 움직여가며
혼자 거의 움직이지 못하는 나를 어떻게든 거기 기대 앉힌 후
산복 더위와 수술 후 덮고 있던 이불 때문에 꼬박 며칠 땀에 찌든 내 무성한 풀숲 같은 머리를
꼼꼼히 샴푸 한 후 샤워기로 감겨주던 그 순간을,
안그래도 머릿결이 안좋은데 내 걱정을 안다는 듯 린스까지 한 후
드라이기로 말려주던 손길을 그 바람을
아마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하리라.
그런 그가
두 아이를 때린 이후로
다시는 예전처럼 그 사람을 좋아할 수 없었다.
결혼식 날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함께하겠다던 맹세도 소용없었다.
'조용한 희망'에서 숀이 알렉스에게 던진 그 질문을 듣고 불현듯 알게 되었다.
나 또한 아무리 해도 그를 다시 사랑할 수 없었다는 걸.
병원을 먼저 그만 간 건 그였지만,
마음 속에서 정리가 되어버린 건 나였다.
또한 그도 나만큼 간절히 아이를 원했었기에
내가 없이도 지금껏 두 아이를 나름대로 열심히 건사해왔다는 것도 조금은 알 것 같다. 지금에서야 말이다.
지난 일요일에 처음으로 지희가 내게 자기 이름을 써 보여주었다. 다섯 살 아이가 쓴 것 치고 글씨가 제법 바르고 예뻤다. 처음 써 본 솜씨가 아니었다.
'내가 옆에서 가르쳐 준 거 하나도 없는데....'
내가 없는 동안 이만큼 자란 아이가 대견하기도 하면서 울컥했다. 아이들 앞에서 울지 않으려 목구멍으로 눈물을 삼켰다.
그날 언젠가 두 아이 중 한 명이 실수로 물을 쏟았다. 아직 손의 힘이 약한 유아에게는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그런데 세희가
"아빠는 물 쏟으면 혼내."
했다.
나도 알렉스처럼 '두 딸의 아빠만큼' 그를 인정해주고 싶은 마음에 그간 켜켜이 쌓아놓은 미움을 잠시 한쪽으로 밀어놓으며 말했다.
"아빠가 깔끔해서 그런 거야."
늦었지만 나의 전남편에게
마음을 다해 사랑해주어
고맙다는 뜻을 전하고 싶습니다.
마지막 3년은 지옥 같았습니다.
하지만 어쩌면 그것마저 당신의 최선이었겠지요.
같이 사는 동안 아끼고 배려해 준 기억은
잊지 못할 거예요.
내 의지로 시작한 이 결혼을 끝까지 함께하지 못해 미안합니다.
평생 함께하겠다던 믿음을 먼저 저버린 내가
어떻게 다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을까요?
나라는 사람이
오늘따라 새삼 잔인하게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