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주희 Jun 05. 2023

천수

 드라마 '닥터 차정숙' 지지난 회차에 백세 환자가 잠깐 나왔다. 주인공 의사는 이 할머니를 최선을 다해 치료하려 하지만, 이미 칠순이 넘은 자식들은 그저 "편하게 해 달라고 했을 뿐"이라며 CT 등 적극적인 치료를 바라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자세한 검사를 하는 의사에게 와서 언제 그런 걸 해달라고 했냐고 따질 정도다. 당사자인 할머니는 병상에서 눈을 뜨곤

 "여기가 저승이야? 이번엔 진짜 간 줄 알았는데, 아직 살아있구먼."

 이라탄식했다. 수명이 길어진 시대, 오래 사는 건 축복받지 못한 일일까?




 서울에 있단 이유로 오랫동안 뵙지 못했던 외할머니를 오늘 만났다. 올해 아흔 하나. 요양 병원에 몇 년간 계시면서 많이 수척해지신 데다 휠체어를 타신 모습이 낯설었다.

 손주가 가도 잘 못 알아본다는 동생의 말에 각오를 하긴 했었는데,

 "니가 누고?"

 라는 물음에 눈치 없는 가슴은 어쩔 수 없이 내려앉았다. 할머니는 엄마를 자세히 바라보시더니

 "큰 딸이가?"

 하시며 다시 나를 돌아보시곤

 "네 딸이가?"

 하시그제야 나를 겨우 알아보셨다.


 할머니는 대화가 조금이라도 끊기면 눈을 감으며 잠에 드시려고 했다. 머리도 아프고, 수술한 다리도 아프시단다. 여름의 초입, 후덥지근한 날씨에도 걸쳐 입으신 경량 패딩 조끼 안에 팔목과 허벅지가 말 그대로 앙상했다.

 결국 우리는 길게 할머니를 붙잡아두지 못하고 다시 올려 보냈다. 할머니와 대화랄 것 없이 흘러간 그 잠깐의 시간이 야속했다. 오랜만에 할머니와 옛날 추억을 얘기하고 싶었는데.


 아주 어렸을 때 할머니와 해운대 바다를 간 적이 있다. 나는 기억하지 못하는 그때의 나는 처음에는 무섭다고 바다에 가기 싫어했다고 한다. 그러다 막상 바다에 들어가고 나서는 어찌나 재미있었던지, 돌아오는 길에 할머니 손을 꼭 잡고

 "할매, 다음에 또 오자!"

 라고 했다고 한다.

 할머니 칠순잔치 때 갓 대학으로 올라갔던 나는 부산에 내려오지 않았고, 그게 죄송해 몇 년 뒤 할머니와 둘이서 해운대 그랜드호텔에 하루 묵었었다. 아마 첫 월급을 타고 얼마 안되었을 때로 기억한다. 저 멀리 지금은 많이 낡아버린 웨스틴 조선 호텔에서 당시 만육천 원이나 하던 김치찌개도 먹었다. 그때 그 김치찌개가 얼마나 별로였는지,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닥터 차정숙에서 그린 백 살 할머니도, 그리고 우리 외할머니도 실은 천수를 누리는 중이실 거라고 애써 생각해 본다. 사람의 목숨은 하늘에서 정하는 바, 우리 눈에는 애달프게 보여도 본인은 어떻게 느끼고 계실지 모르는 거니까 말이다.


 할머니, 이승에서 남은 시간 부디 이 세상이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기를 바랍니다. 할머니가 저와 더는 이야기를 나누실 수 없다  너무 슬퍼하지 않을게요. 저는 서울에서 가끔 할머니가 좋아하는 지리 복국을 먹어요. 명절 때 두 이모와 두 외삼촌네가 다 모이면 스무 명이 넘게 북적거리던 초등학교 시절 옛날 외갓집도 생생히 기억해요. 두 상으로 나눠서 정신없이 밥을 먹었던 그곳을 오늘은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네요. 할머니는 이렇듯 제게 일부분으로 남아있고, 앞으로도 그럴 거랍니다.



작가의 이전글 의외의 행복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