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기본값은 무엇인가요?
며칠 전 초등학교 친구 J에게 오랜만에 연락이 왔다. 작년 가을이 목소리를 들은 마지막이었으니까 근 6개월 만이었다. 전화를 받자마자 J의 소송 결과를 물었다. J는 나보다 몇 개월 앞서 이혼 소송을 시작했고, 3월이면 결판이 난다는 걸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3월에 잘 끝났어. 재산도 나한테 유리하게 잘 판결 났고. 다만 그쪽이 또 항소하긴 했는데... 석 달 안에 곧 끝날 거야."
남편의 반복되는 손찌검 얘기를 내 편에서 다 들어준 다음에는 늘 가정을 지키는 쪽으로 조언을 해주던 J였다. 그러던 J가 어느 날 갑자기 "나 이혼 소송 시작했어."라고 말했을 땐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사유는 부인의 외도였다. 게임을 통해 만난 부산 남자와 바람이 났다고. 들키고 나서 눈도 깜짝 안 하고 인정을 하더라고 그랬다. 그렇게 막상 J가 먼저 이혼 소송을 시작하자 그때부터는 내 소송의 길잡이 같은 역할을 해주었다. 변호사의 역할부터 대략 진행될 기간까지, 법률사무소 상담을 하며 대략 알게는 되었지만 전화만 하면 기꺼이 대답을 해주는 J가 있어 나는 이혼 소송을 거의 알고 시작한 거나 다름이 없었다. J가 없었다면 충분한 고려 없이 홧김에 이혼 소송을 좀 더 빨리 시작했었으리라.
더 이상 J도 내게 남편과 잘해보라는 말을 꺼내지 못할 지경이 되고 나서야 나는 고민 끝에 결국 소를 제기했다. 그게 지난 9월이었다. 근 반년만에 다시 연락이 된 우리는 내 생일을 축하할 겸 한 한정식 집에서 만났다. 초등학교 친구이면서 어른이 된 후 십오년을 넘게 알고 지낸 터라 오랜만에 보아도 어제 만났던 것처럼 어색함이 없었다. 그간 다이어트로 10kg를 뺐다는 그의 몸이 몰라보게 슬림해져 보기 좋았다. 나와 떨어져 지낸 그 시간이 J에겐 오히려 약이었을까? 우리는 모처럼 그간 있었던 이런저런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생일 당일에는 영주와 지어진 지 얼마 안 되는 새 호텔에서 1박을 했다. 일주일 만에 만난 영주의 품에 리시안셔스 꽃다발이 들려있었다. 연분홍색과 크림색의 큼지막한 꽃송이가 안개꽃 같은 자잘한 하얀 송이가 군데군데 붙은 나뭇가지와 어우러져 보기만 해도 마음이 그득해졌다. 미니바에서 음료수와 과자를 꺼내 먹는 것을 시작으로 지하의 근사한 수영장을 가고, 사진을 찍었다. 저녁으로는 호텔 레스토랑에서 해산물 그릴 요리와 함께 스파클링 와인 한 잔을 곁들였다. 2017년에 아이들이 태어난 후로 누구에게도 한 번도 제대로 챙겨 받지 못한 생일을 4년 만에 뻑적지근하게 몰아서 기념한 셈이었다.
다음 날 늦잠을 자고 일어나니 바깥은 완연한 5월이었다. 계절의 여왕이 온 세상에 눈부신 햇살의 손길을 빠짐없이 뻗치고 있었다. 호텔 체크아웃을 하고 집에 들렀다 저녁에 현악합주공연을 보러 콘서트홀로 나섰다. 코로나 때문에 거의 일 년 만에 실제 현장에서 관람하는 공연이었다. 여러 대의 바이올린과 첼로, 더블베이스가 비발디의 사계와 피아졸라의 사계를 교차로 연주해 이탈리아와 아르헨티나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차례로 느낄 수 있었다. 마지막에 앵콜로 290년 된 음악감독의 바이올린이 '시네마 천국'을 연주하는 걸 듣고 있자니 황홀경이 느껴졌다. 가슴에 저절로 두 손이 모아졌다. 공연을 다 보고 영주와 헤어져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니 밤 열 시가 훌쩍 넘어있었다.
지하철 역을 나와 집으로 가는 길, 눈부시던 오월의 낮은 어느새 자취를 감추고 나지막이 봄밤이 내려와 앉아있었다. 낮동안 활짝 핀 꽃향기가 밤공기에 향을 더해 볼 수 없어도 아름다웠다. 그날 밤은 아카시아 향이 났다. 그렇게 아름다운 오월이 결국 오긴 왔구나. 낮이건 밤이건 가리지 않고 실컷 돌아다니다 돌아온 집. J와 영주와 마음껏 내 생일을 축하하고, 많은 사람들 틈에 있다 홀로 되니 조금 외로우면서도 편안했다.
'아, 이게 혼자의 느낌인가.'
요즘 계속 생각하던 ‘나란 사람의 기본 값’이 이런 상태인지 자문이 들었다. 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보다 이렇게 혼자 있는 게 더 편안한가 싶어 시작한 생각이었다. 좋아하는 친구와 같이 있는 시간은 무척 소중하고 기쁘지만, 그래도 마지막에 돌아온 내 집에서의 홀로 있음이 내게는 더 익숙하게 느껴졌기에.
그래, 나란 사람의 기본값은 어쩌면 지금 같은 상태일지 몰랐다. 조금 외롭지만 익숙하고, 그래서 편한. 그렇다면 너무 애쓸 필요 없는 게 아닐까. 더 많은 친구. 더 마음 맞는 사람. 그리고 더 많은 애정도.
이전처럼 J에게 '잘 놀고 집에 들어왔다'는 전화를 걸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어쩌면 내 전화를 기다리고 있을 J의 얼굴이 떠올랐다. 하지만 나는 이제 알았다. 남편과 매일을 전쟁처럼 살며 틈이 날 때마다 하소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그때처럼 지낼 수는 없다는 걸. 내게는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지금의 우리 사이가, 너무 편할 뿐 아니라 또한 그 간격으로 인해 아름답기도 하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