된장국과 피노누아

국과 와인의 닮음과 다름

by 이주희

“선생님, 근데 와인이 사실 우리나라의 국 같은 거 아닌가요?”

“맞아요. 그런 개념이에요. 정확히 잘 표현하셨네.”

와인을 즐겨 마시면서도 한 번도 수업을 듣지 않다가 처음으로 가 본 부르고뉴 특강에서 한 남자분이 와인이 ‘국’처럼 메인 음식에 곁들이는 의미가 아니냐며 물었다. 그런 발상이 신기했다.

어렸을 때 부모님께서 농부의 수고에 감사하며 쌀 한 톨도 아껴 먹으라고 하셨다. 그처럼 한 병의 와인도 알고 보면 1년 동안의 포도 농사가 오롯이 들어있다. 겉으로 봐서는 매끈한 유리병에 외국어가 잔뜩 적혀있어 어렵게 보이기 쉽지만 와인이야말로 대지와 농부의 노력, 그리고 그 해의 날씨가 함께 빚어낸 산물이다.

겨울이 제철인 굴을 메인 음식으로 먹는다고 생각해보자. 여기에는 무엇보다 프랑스 화이트와인 샤블리가 잘 어울린다. 굴의 우유같은 크리미한 향과 짭쪼롬함이 샤블리의 비릿하지만 오크향이 풍기는 묽은 알코올을 만나 서로를 더 잘 느낄 수 있게 해준다. 향이 강한 굴을 국과 함께 먹는다면 어떤 국을 곁들이더라도 양쪽의 맛이 다 살기가 어려울 것이다.


와인을 잘 알려면 한 병을 혼자 비우기보다 여럿이 모여 다양한 와인을 나눠 마셔보는 테이스팅이 큰 도움이 된다. 와인도 일종의 경험이라 많이 마셔본 사람을 이길 순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이러한 테이스팅 모임을 특별히 좋아하는 여러 이유 중 하나는 그 ‘격식 갖춤’에 있다. 집에서 편한 옷을 입고 밥과 국을 먹는 게 아니라 특별히 맛있는 술을 잘 어울리는 음식과 매치해서 먹으려고 모이는 거니까. 매너가 자연히 따를 수밖에 없다. 와인의 맛과 향을 가장 잘 느끼기 위해서는 마시기 며칠 전부터 목욕재계까지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의 컨디션 관리가 필요하다.

그리하여 이런 테이스팅 모임이 있는 날은 나를 최대한 신경써서 단장을 하고 나간다. 옷을 고를 때도 신중해진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 또한 나처럼 갖춰 입고 온다는 사실이 좋다. 함께 좋은 시간을 나눌 자리에 대한 예의처럼 느껴져서다. 그리고 그에 관해 서로 가벼운 칭찬을 주고받는 것 또한 좋다.

테이스팅 모임은 대개 전채요리로 시작을 한다. 그리고 술은 보통 샴페인을 처음에 마신다. 충분히 칠링된 샴페인을 긴 잔 안에 따른다. 그 후 먼저 눈으로 술의 금빛과 그 위로 흩어지는 기포가 선사하는 반짝임을 충분히 감상한다. 다음 코로 가져가 꿀향, 라임향 등 그날의 샴페인이 자신을 드러내는 향을 음미해준다. 마침내 입 속으로 그 액체가 목을 타고 미끄러져 들어갈 때, 향에서 예상했던 맛과 실제의 맛을 비교한다.

‘와, 시원하다. 그리고 입에서 파지직 튀네? 단맛은 거의 없군. 무겁지 않아서 좋다.’


와인 네 잔을 마시는 데 보통 세 시간쯤 걸리는 것 같다. 그만큼 천천히,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며 마리아주한 음식과 함께 즐긴다. 지루할 틈이 없다. 우리나라에 미역국, 아욱국, 쑥국 등 다양한 재료로 만든 국이 있듯이, 와인도 이탈리아, 미국, 칠레, 프랑스 등 다양한 지역에서 다양한 포도 품종으로 생산을 한다. 그리고 그 해 폭염이 오면 같은 밭의 와인도 그 전과 맛이 미묘하게 달라진다. 내 모습도 인생에서 감당하기 힘든 일을 겪고 나면 조금씩 바뀌듯이. 알면 알수록 와인은 생명을 가진 생물과 닮은 점이 많다.

공들여 화장을 한 내 얼굴은 취기가 오르며 더 어여뻐진다.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훌륭한 와인을 맛보고 앉아 있노라면 나는 누구의 딸도, 누구의 선생님도, 내일모레 은행에 이자를 갚아야 할 채무자도 아닌 그저 ‘지금 여기서 맛있는 와인을 마시고 있는 무척 행복한 한 사람’이 된다. 그리고 더 기분이 좋아지면, 마치 하늘을 나는 것 같다.

여러 가지 와인 중에서도 나는 부르고뉴 피노누아를 가장 좋아한다. 지금의 인생이 얼마나 나를 냉담하게 대하는지와 상관없이, 부르고뉴 피노를 열면 시공간을 초월해 따사로운 한낮의 꽃밭으로 갈 수 있다. 그리고 그 술은 꽃이 만발해 잔에 가득 차다 못해 피어나는 것 같은 이 향기를 얼른 맡아보라고, 어서 이 작품을 한 입 마시고 엉망진창인 현실은 좀 뒤로해보라고 나에게 유혹의 말을 건넨다. 색깔마저 하늘하늘한 루비빛의 그 액체를 아끼고 아껴서 조금씩 넘기다 보면, 어느샌가 나는 아름다운 정원의 주인이 되어 그곳을 거닐고 있다.

하지만 취하고 난 뒤 집에 돌아와 나는 생각한다. 이제 이런 황홀경을 더 이상 느끼지 않아도 좋으니, 내 아이들에게 슴슴한 된장국을 끓여주는 맨얼굴의 엄마로 돌아가고 싶다고. 고단한 하루의 끝에 아이들을 모두 재운 후 몰래 셀러에서 꺼내 마시는 한 잔의 피노누아만으로도, 나는 이제 충분할 것 같다고.

keyword
작가의 이전글이츠 낫 유어 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