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e You Again.
여행을 일상처럼 다니는 나는 아이들이 갓 돌이 지나서부터 제주도를 시작으로 이곳저곳을 다녔다. 남편의 폭력이 한참 심했던 작년 봄에도, 코로나 때문에 집에 갇혀 있던 답답함에서 벗어나고 싶어 가평의 한 풀빌라를 예약했다.
그런데 여행을 떠나기 전부터 문제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남편이 주말에 또 손을 들어 112에 신고를 했고, 경찰에 남편이 처벌받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대신 정말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부부상담을 받자고 그에게 간곡히 요청했다. 그가 상담을 받겠다고 하지 않으면 여행을 모두 취소해버리겠다고도 했다.
결국 남편이 여행 하루 전 날 거기에 응했고, 우리는 겨우 떠날 수 있게 되었다. 여행을 떠나기 하루 전 날 당시 유행하던 드라마 ‘부부의 세계’에 나온 지선우처럼 나 또한 펜션에서 남편에게 뺨이라도 맞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고, 동료에게 이런 내 마음을 털어놓았다.
“차라리 지선우처럼 맞아서 피가 철철 날까봐. 그럼 현장 증거도 확실하고 남편도 자기 잘못을 발뺌 못할 거 아냐?”
몇 년 간 계속된 신고에 적응이 되었는지 이골이 났는지, 이제는 경찰에 불려 가서도 손을 올리지 않았다고 뻔뻔스럽게 거짓말을 하는 남편이었다. 그렇기에 농담 반 진담 반이 섞인 소리였다. 동료는 무서운 소리 하지 말라며, 그렇게 위험한데 여행을 꼭 가야 하느냐고 물었다. 괜찮다고는 했지만, 나도 혹시 무슨 일이 생길까 불안한 건 사실이었다.
다행히 풀빌라에서 별 일없이 하룻밤이 지나갔다. 아이들은 생각보다 꽤 깊었던 풀에서보다 자그마한 욕조에서 더 잘 놀았다. 방 곳곳에 있는 트램펄린이며 정글짐을 쉴 새 없이 왔다갔다하며 즐거워했다. 우려했던 폭력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 다음날 오전 코스는 아침고요수목원과 동물원이었다. 예전에는 수목원만 있었는데 언제 동물원이 생겼는지 모를 일이었다. 구경을 마치고 수목원을 나가다 조수석에 앉아있던 나는 한 안내석을 보고 갑자기 온몸이 굳어졌다.「다음에 또 오세요. See You Again.」이라고 적힌 돌이었다. 주위는 암전 되었고 십몇년 전 같은 안내석을 처음 보았던 그 날로 나는 플래시백해 들어갔다.
그 때 나는 인생을 통틀어 가장 사랑했던 사람과 함께였지만, 거기에 적혀있는 것처럼 ‘그와 함께’ 이 곳에 다시 올 수는 없으리라는 강한 예감을 하고 있었다. 서로 많이 사랑했지만, 용기를 내 찾아간 내 부모님의 반응을 그는 일종의 거절이라고 생각했다. 회사에 본격적으로 나가기 전인 그 때 그의 주머니는 이미 사회인이었던 나의 그것에 비해 너무 가벼웠다. ‘세상에 남자는 많고 나는 젊다’고 자신했던 나의 오만은 우리가 서로 만나고 헤어지기를 몇 번이나 반복하게 한 후였다.
1년여의 잊지 못할 연애를 뒤로 하고, ‘다시는 오지 말라’고 해도 늘 다시 집 앞에서 나를 기다리던 당신이 정말로 ‘다시는 오지 않게’ 되고 나서야, 10여 년이 지난 지금 돌아보니 그 때가 내 생애 가장 빛나던 시절이었음을 이제야 알았다고 말하면 그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렇게 내가 ‘뭘 잘 모르는 채로’ 당신을 보내고 나서, 기껏 살고 있는 지금의 하루하루가 이러하다고. 언제 남편에게 폭행당할지 몰라 마치 시한폭탄을 안고 전전긍긍하는, 그런 매일매일의 공포 속에 나 자신을 쪼그라트리며 살고 있다고 하면 그는 이 모든 게 ‘내가 그를 버린 벌’이라며 나를 쏘아붙일까?
다음에 또 같은 곳을 오게 된다면, 그 때는 저 돌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문득 궁금해졌다. 「다음에 또 오세요. See You Again.」이라는 문구를 보며 과거가 된 이 순간을 어떤 식으로 떠올리게 될지 지금으로써는 잘 모르겠다. 부디 후회는 덜하고, 그 때 그렇게 하길 참 잘했었다고 되돌아보는 그런 과거로 남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