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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연에서 걷다

모순

by 안전모드


“안녕하세요. 딸2 아빠, 아무개입니다. 혹시 XX 아버님 되시나요?”
“제가 출근하고 나면, 아드님이 아침 8시쯤 저희 집에 들러 딸2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학교에 갑니다.”
“오늘 저녁, 잠시 뵐 수 있을까요?”


퇴근 후, 집 근처 커피숍에서 그 아이의 아버지를 만났다.
고단함이 얼굴에 그대로 묻어나고 있었다.
그를 보는 순간, 수많은 감정이 뒤엉켜 마음 안에서 부유했다.

그도 나처럼 다섯 해 전 이혼했고, 아들 셋을 어머니와 함께 키우고 있다고 했다.
같은 무게를 이고 걷는 사람에게 섣불리 분노를 쏟아낼 수는 없었다.

그래도 말은 해야 했다.

“같은 학교 선후배로서 마주칠 수밖에 없다는 건 이해합니다.
하지만 다시는 제 집에 오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만약 비슷한 일이 반복된다면, 그 책임은 반드시 아버님께 묻겠습니다.”

나는 감정을 누르고, 조용히 그러나 또렷하게 말끝을 맺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말했다.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두 달여 동안, 딸2의 잦은 일탈과 사건들로 나는 마음의 중심을 완전히 잃었다.
밤마다 맥주 한 캔 없이는 잠을 이루지 못했고,
“이대로는 안 된다”는 속삭임이 가슴속을 맴돌아도 몸은 좀처럼 따라주지 않았다.

협박도 해보고, 달래보기도 했다.
하지만 딸2는 멈추지 않았고, 나는 부모로서 무너지고 있었다.

딸1에게 만큼은 그 사실을 감추고 싶었다.
기숙사에 데리러 갈때마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결국 들키고 말았다.
폰 어플로 연결된 집 CCTV 속 영상, 강아지 영상을 보려던 딸1이 먼저 본것이다.
그날, 딸1은 펑펑 울었다.

그러나 아이는 생각보다 단단했다.


“삶은 원래 그런 거야.
탄탄대로가 아니라 막히고, 무너지고, 시궁창을 헤매기도 하지.
그래도 또 일어나서 나아갈꺼야.”


함께 읽었던 양귀자의 『모순』을 떠올리며,
딸1은 담담히 말했다.

“이 또한 지나갈 거야. 인생의 몇 페이지일 뿐이야.”


그 말이, 마음 깊숙한 곳에 맺혔다.

이미 모든 일이 벌어진 뒤였다.
출근하고,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 멍하니 앉아 있던 시간들.
그 속에서 나는 문득문득 내 마음을 들여다보았다.

나는 이전에 어떻게 다시 일어났더라?

몸이 먼저 기억했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을 만큼 달리고, 땀을 흘리면 마음이 리셋되곤 했다는 걸.

그래서 다시 집 밖으로 나갔다.
달리고, 또 달렸다.
아무도 없는 밤길을 홀로 뛰며 땀을 흘렸고, 샤워를 마치고 나면 마음이 조금 개운해졌다.

그렇게 두 달이 훌쩍 지났다.
나는 조금씩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내게 주어진 역할, 내 곁에 있는 딸들, 그리고
나 자신의 삶을 다시 중심에 놓아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삶은 종종 우리를 심연에 던진다.
그 안에서 허우적대는 동안에는 도무지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몸을 움직이면, 아주 조금씩 그 어둠을 걷어낼 수 있다.

눈물은 약함이 아니라, 회복을 향한 준비다.
그리고 누구보다 강했던 딸1이 내게 그걸 먼저 알려주었다.

우리는 다시 살아간다.
지나간 페이지는 접어두고,
다음 장을 넘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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