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말은 필요 없고

- '정혜신'의 <당신이 옳다>를 읽고

by 이응지읒
나 자신에게 가장 좋은 조언을
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고등학교 3학년 다이어리 첫 페이지에 적은 문장이다. 당시 나는 이것을 깨닫고 마음에 새겼다.


아무리 전후 사정을 자세히 말한다 해도 다른 사람은 내가 아니므로 그의 충고나 조언은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어쨌거나 선택은 나의 몫이고, 그 결과를 감내하는 것도 ‘나’이기에 타인에게 답을 구하는 일은 무의미하다.


나는 고민이나 생각으로 마음이 답답할 때 남에게 이야기하기보다 일기를 쓰거나, 벽을 보고 나와 대화를 하거나, 휴대폰에 녹음을 하며 생각과 감정을 정리했다.




<당신이 옳다>의 저자 ‘정혜신’은 마음에 대해 묻는다.


‘행복’을 강요하는 시대에 자기 마음에 솔직하기란 쉽지 않다. 우울하고 무기력한 상태는 대놓고 드러내기 꺼려진다. 사실 매일 매 순간 행복할 순 없는데 말이다.


자기 ‘마음’에 집중하라고 한다. 내면의 소리, 내면의 감정에 귀를 기울여야 ‘내’가 사라지지 않는다고 했다.


듣는 사람은 그 마음에 반응하고 집중해주면 된다. 어줍지 않은 ‘충고, 조언, 평가, 판단’은 하지 말고 마음을 듣고 이해하고 끄덕여주는 ‘지지’가 필요하다고 한다.




나의 가장 큰 지지자는 초등학교 4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셨다. 대학을 졸업한 지 2~3년 정도밖에 안된 젊은 여자분이셨는데, 아이들의 생활 및 교육에 관심과 열정이 넘치셨던 분이다.


우리 반은 일기장이 특별했다. 일반 공책이 아닌 직접 그려서 만들었다.


선생님과 자원한 학부모들은 A4용지에 줄을 긋고 그림을 그려 일기장 종이를 디자인해주신 것이다. 한 달을 주기로 새로운 일기장 페이지를 받았는데, 이번에는 어떤 모양일까 기대하며 그날을 기다렸다.


일기장 맨 밑에는 ‘선생님 말씀’ 칸이 있었다. 선생님은 빨간색 펜으로 항상 코멘트를 달아주셨는데, 나는 그게 선생님과 편지를 나누는 기분이 들어 일기를 빼먹지 않고 열심히 썼다.


‘참 잘했어요.’ 도장에 아무리 많은 별이 있다 해도 선생님의 동글동글한 글씨 세 줄에는 비할 수 없었다.


선생님 자리는 쉬는 시간이면 언제나 붐볐다. 아이들은 선생님 주변으로 몰려가 이런저런 자기 이야기를 했는데, 나도 그들 중 하나였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이제는 기억도 안 나지만 선생님은 우리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반응하고 웃어주고 고개를 끄덕여주셨다.


대화가 끝날 쯤에는 항상 한 명씩 안아주셨다. 나는 아직도 그 품이 따뜻하고 포근한 걸로 기억한다. 선생님이 자주 입으시던 분홍 스웨터 때문에 그런 건지는 몰라도.


생일에는 반 전체가 생일자에게 편지를 썼는데 선생님은 내 생일 편지에 ‘선생님이 안아줄 때면 웃는데,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하구나.’라고 쓰신 걸 보면 내가 선생님을 좋아하고 따랐던 게 표정에서 드러났던 모양이다.


이후 대학시절 교회 아동부 교사로 봉사를 했다. 맨 처음 맡았던 반은 초등학교 5학년 여자 아이들이었다.


새해 첫 주일,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하고 반 아이들에게 우리 반 인사는 무조건 포옹이라고 말했다. 대부분은 쑥스러워하면서도 포옹을 하고 집으로 갔지만 한 아이만은 유독 싫다는 표정을 지었다. 권사님이신 할머니 때문에 교회를 나오긴 하지만 특별히 친한 친구 없이 혼자 시큰둥하게 있다 가는 아이였다.


나는 버팅기는 아이를 꼭 안은 뒤 집으로 보냈다. 아이는 곧 적응했고 이후 포옹은 자연스러워졌다.


미국의 심리치료사 ‘버지니아 사티어(Virginia Satir)’는 사람은 생존을 위해서는 하루에 4번, 삶의 유지를 위해서는 하루에 7번, 성장을 위해서는 12번의 포옹이 필요하다고 했다.


아주 어릴 때는 안기고 안는 게 일상이지만 언제부턴가 연인이 아닌 이상 포옹을 하는 일이 거의 없다.


의사소통이 말보다 눈빛, 몸짓 등 비언어적 부분으로 이뤄지는 게 더 많은 것을 생각할 때 <당신이 옳다>에서 말하는 마음을 묻고 들어주는 게 심리적 포옹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서로의 가슴을 맞대고 등을 토닥이는 것에 다른 말은 필요 없다. 그것만으로도 마음은 충전될 수 있다.


한때 프리허그가 유행처럼 번졌던 때가 있었다. 모르는 사람과의 포옹에도 기운이 나고 용기를 얻는데 가까운 사람에게 지지를 받으면 얼마나 더 힘이 날까.


'기운 내'라는 말이 필요한 게 아니다. 누군가의 고민을 해결해주려는 건 어쩌면 오만한 생각일지도 모른다. 그냥 상대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고 그 감정이 고인 마음을 안아주는 것, 그렇게 그대로를 인정해주는 게 필요하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보는 게 힘들다면 내 마음부터 돌아보자.


어쩌면 '나'는 나와 가장 가까운 '나'의 심리적 지지가 필요했던 건지도 모른다.


‘그래야만 하는 나’로 보지 말고 ‘지금의 나’와 있는 그대로 마주 보는 시간을 갖자. 그리고 나에게 묻자.


지금 마음이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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