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로나민 골드

- 청춘이여 안녕

by 이응지읒

기억 속 외조부모는 흰머리에 주름진 노인이었고, 항상 어디가 아프고 쑤신다고 하셨다.


고혈압, 당뇨, 관절염 등 각종 질병용 약과 건강보조 제품을 두는 선반이 따로 있었고, 식후에는 항상 알록달록한 약들을 드시는 게 일이었다.


나는 그게 약인 줄 알면서도 매번 '할머니 뭐 먹어?'라며 묻곤 했다. 동생은 외조부모의 보약을 자기도 먹겠다며 마지막 한 모금을 달라고 했고, 나는 동글납작한 노란색 비타민제를 얻어먹곤 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아로나민 골드'였다. 그 약은 기다란 사각형 철통에 담겨 있었는데, '골드'라는 이름 때문인지 통 전체는 밝은 노란색이었고, 짙은 남색 바탕 위에 끝이 둥근 고딕체의 하얀색 글씨로 제품명이 큼지막하게 적혀있었다.


아로나민 골드의 철통은 꽤 튼튼했고 손에 잡히는 크기도 적당했다. 그 통은 나의 장난감 저장소였다. 구슬이나 딱지, 조그마하고 귀여운 지우개, 플라스틱 액세서리 같은 것들 말이다. 그래서 통에서는 항상 기분 좋은 소리가 났다. 달그락달그락.




아로나민 골드 통의 장난감들이 사라지고 그 약의 이름마저 희미해질 때쯤,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그 이름을 듣게 됐다.


너희 영양제 같은 거 안 먹니?
나 요즘 체력이 바닥이야.
아로나민 골드라도 먹어야겠어.

다섯 살짜리 아들을 키우는 친구의 말이었다.


'아로나민 골드. 잠깐. 우리 아직 삼십대잖아. 아로나민 골드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먹는 거 아니야?'


아무렇지 않게 아로나민 골드를 언급하는 친구가 낯설게 느껴졌다. 우리가 그 정도로 늙었나.




이십 대 초반, 워킹홀리데이로 갔던 뉴질랜드에서 만난 친구들 모임이 있다. 당시 넷이었던 모임은 아직 미혼인 남자애를 제외한 여자 셋과 그의 남편들과 아이들까지 이제 총 열명이 되었다. 사는 곳이 서울, 영종도, 거제도, 제주도인지라 일 년에 한 번 마음먹고 모여야 겨우 볼 수 있다.


작년 3월, 우리는 송도에서 모였다.


서로 근황을 이야기하는데 거제에 사는 미혼 남자애가 '투르 드 프랑스'에 간다고 자랑을 했다.


"투르 뭐? 그게 뭔데?"


투르 드 프랑스는 전 세계적인 자전거 대회인데, 참가는 아니고 동호회 회원들과 함께 대회 코스를 달려보며 기분이라도 내겠다는 거였다. 그 때문에 드론도 샀단다.


그런데 소파에 앉아있는 폼이 좀 이상하다. 한쪽으로 기우뚱한 자세였다.


너 왜 그렇게 앉아?

그는 얼마 전 과도한 자전거 타기로 엉덩이 근육이 찢어졌다고 말했다.


"뭐라고? 뭐가 찢어져?"


우리는 한바탕 웃으며 그를 질타했다.

무식하다, 무식해. 얼마나 많이 탔기에!


동호회 회원인 상사가 세 달 동안 지금까지 탄 자전거 키로 수의 두 배를 타면 자기가 산 비싼 자전거 바퀴-삼백만 원이라고 했던 것 같다-를 주겠다는 제안을 했다는 거다.


그래서 주말만 타던 자전거를 매일 아침 출퇴근, 각 한 시간 넘게 탔단다. 그게 무리가 되어 엉덩이 근육이 찢어졌고 딱히 치료법이 없어 아픔을 감수하는 중이라고 했다.


우리는 입을 모아 그의 무모한 도전에 야유를 보냈다.


야, 아직도 이십 대인 줄 아냐?

다음 날 아침, 가장 먼저 일어난 그는 숙소 거실에 비치된 잡지를 뒤적이고 있었다. 그러다 광고성 기사가 분명해 보이는 페이지의 '루테인 약'을 내게 보이며 괜찮지 않냐 물었다.


아직 국내 정식 출시가 안 된 미국 제품이었는데, 어떤 시험에서 무슨 효과를 입증받았다는 건강기능식품 단골 멘트가 부각돼있었다. 가격은 국내 제약사에서 나오는 루테인의 다섯 배 이상 비쌌다.


안구건조증도 있는 그는 엉덩이 근육을 위한 스트레칭으로 허리 숙여 손바닥 땅 닿기를 하며 내게 평소 운동을 꾸준히 하라는 조언을 했다. 그리고 휴대폰으로 미국 루테인 제품 정보를 찾기 시작했다.


따뜻한 봄날일 것이라 기대했던 여행은 예상외로 추운 날씨 속에 진행됐다. 거기에 둘째 날 숙소 보일러가 동파됐고 교체 작업이 늦어져 자정이 지나서야 뜨거운 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거금을 들인 팔십만 원짜리 숙소에서 벌어진 일이라 나를 포함한 여자들은 직원에게 대단한 컴플레인 시위 후 숙박권 보상을 받아냈다. 열 받고 식히고, 열 받고 식히고. 그 과정의 스트레스가 만만치 않았다.


모임이 끝나고 집에 온 다음 날, 여자들은 앓아누웠다.


나는 출근 후 설사를 세 번이나 하고 근처 내과에서 수액을 맞은 뒤 다음날 휴가를 냈다.


영종도 친구는 감기몸살에 걸려 남편이 오후 반차를 내고 집에 왔지만 모유 수유 때문에 약도 못 먹고 버텼다.


제주도 언니는 네 식구 모두 감기몸살로 온몸이 두들겨 맞은 듯하다고 했다.


하지만 단 한 명, 거제도 친구는 멀쩡했다. 아직 미혼이라 그런지, 평소 운동을 해서 그런지, 기능성 식품을 잘 챙겨 먹어 그런지, 그 엉덩이 하나만 빼고는 멀쩡했다.


아로나민 골드.


예상보다 가까운 시일 내에 만나게 되는 거 아닐까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요즘은 종이박스로 나오는 것 같던데.


단단한 옛 철통이 그리웠다.

막 굴려도 흠집 하나 없던 그 노란 통이, 통 안에 들어있던 자질구레한 추억들이.

매거진의 이전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