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진한 생각

- 학창 시절 교우관계

by 이응지읒

"여기서 아까 내가 했던 말에 찬성하는 사람 손들어."


가운데에 있는 여자아이가 말했다. 그러자 열몇 명의 아이들 중 한 명만 제외하고 모두 손을 들었다.


아이들은 손을 들지 않은 아이를 쳐다봤다. 그 아이는 멀뚱히 다른 아이들을 둘러봤다.


등나무 교실 위로 5월의 밝은 햇살이 보슬보슬 비추고 있었다.


가운데 여자아이는 한껏 더 의기양양해져 손을 들지 않은 아이에게 말했다.


지금 손든 애들은
너랑 놀기 싫다는데 동의한 애들이야.
앞으로 우리랑 놀 생각 마.

가운데 여자아이는 홀가분해진 기분으로 등나무 교실 책상 위 던져뒀던 가방을 둘러멨다. 오늘 하루 종일 모의한 일을 성공한 것이다.


나머지 아이들도 가방과 신발주머니를 챙겼다. 무리는 삼삼오오 팔짱을 끼고 교문 쪽으로 향했다.


손을 들지 않은 아이가 따라와 가운데 있던 여자아이에게 물었다.


“오늘 같이 놀기로 했잖아. 그냥 가는 거야?”


아이는 답답하다 못해 화가 나는 걸 누르며 말을 했다.


“진경이가 너랑 노는 게 싫대. 다른 애들도 그렇고. 그러니까 앞으로 우리랑 놀려고 하지 마.”


아이는 팔짱 낀 진경이와 쌩하니 앞서 걸어갔다.




열두 살 때 일이었다.


다음 해 나는 진경이와 다른 반이 됐고, 그 애 와는 특별활동에서 만났다. 속으로 뜨끔했는데 그 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대했다.


내가 모진 말을 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꾸 들러붙는 그 애 때문에 불편해하는 친구를 돕고 싶었다.


진경이는 공부도 잘하고, 예쁘고, 착하고. 우리 반에서 누구나 좋아하는 아이였다. 진경이는 나랑 제일 친했고 나는 계속 그 애의 절친이고 싶었다.




중학교 때 우리 반에는 지능이 약간 낮은 남자애가 있었다.


반 아이들 중 소위 일진인 애들은 심심할 때마다 그 애에게 춤을 춰보라고 시켰다. 그 애는 교실 뒤쪽으로 나가 우스꽝스러운 동작을 아주 열심히 했고 반 아이들은 그걸 보며 배꼽 잡고 웃었다. 나는 그 모습이 민망하고 안쓰러웠다. 하지만 그 애는 그렇게라도 주목받는 걸 좋아하는 듯했다.


여자아이들은 그 애에게 반에서 좋아하는 여자애들 순위를 적으라고 했다. 그 애는 매번 진지하게 고민하며 순위를 적었다. 순위를 받아 든 여자애들은 1등이 된 애에게 '야, XX가 너 좋아한대~'라며 놀렸다.


그중 순위권으로 자주 이름을 올렸던 여자애들은 그 애에게 종종 이렇게 말했다.


야, 너 나 좋아해?
그럼 내일 사탕사와.

장난이었지만, 그 애는 매번 잊지 않고 다음 날 사탕 한 봉지를 사 왔다. 여재애들은 그 사탕을 친구들에게 나눠줬는데 나는 받으면서도 매우 찝찝했다. 이게 괴롭히는 건지, 놀아 주는 건지, 판단하기 애매했다.


나는 반 아이들이 그 애를 대하는 태도가 못마땅했지만 그렇다고 그를 없는 사람 취급하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나는 그 애와 단 한 번도 말을 하지 않은 채 한 학년을 보냈다.




나는 다른 지역에 있는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나와 같은 중학교 출신은 1학년 통틀어 5~6명 정도였고, 그중 한 명과 같은 반이 되었다.


처음 배정받은 자리는 번호순이었는데 나는 8번, 그 애는 40 몇 번이라 같이 놀기에는 자리가 너무 멀었다.


다행히 내 뒤에 앉은 애가 성격이 활달해 그 애 중심으로 내 짝과 앞, 뒷 총 5명과 그럭저럭 친해졌다.


어느 날 그 애들은 내가 남녀공학을 나온 걸 알고 소개팅을 해달라고 졸랐다. 연락하고 지내는 남자 동창이 없었지만, 새로 사귄 친구들의 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


어떡할지 고민하다 남녀공학으로 진학한 여자 동창에게 같은 반 남자애들 다섯 명을 좀 소개해달라고 부탁했다.


만남이 있기로 한 토요일, 소개팅은 불발됐다.


나는 고등학교 친구들과 중학교 동창, 양쪽 모두에게 미안한 처지가 됐다. 두쪽 다 나에게 서운함을 표했고, 나는 중학교 동창을 달래러 그 애의 뒤를 따라갔다.


소개팅을 부탁한 사람은 나였으니까 동창에게 더 미안한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다음 주 월요일, 분위기가 싸했다.
난 따돌림을 당하는 처지가 되어 있었다.

이들이 삐질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소개팅 약속 장소에 나가 좀 기다리긴 했지만 나온 남자애들이 마음에 들지 않다고 퇴짜를 놓은 건 이쪽이었다.


어찌 되었든 미안하다고 했고 기분이 곧 풀리겠지 생각했지만 냉랭한 태도는 오래갔다.


이들은 내가 현재 친구인 자기들보다 중학교 동창을 챙겼다는 것을 못마땅해했다. 미안하다는 편지도 쓰고 사과도 여러 번했지만 한번 어색해진 관계가 이전과 같기는 힘들었다.


자리가 바뀌기 전까지, 나는 사방이 막힌 바둑돌처럼 답답하고 참담한 심정이었다.




사람은 타인에게 배제되면 뇌의 아픔을 느끼는 곳이 활성화된다고 한다. 소속집단에서 거부당하는 아픔이 크기 때문에 자신의 믿음과 원칙을 버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동조할 때가 있다.


나는 순진했다. 어리숙했고, 고립될까 두려웠다.


그때는 알지 못한 것이다.


관계는 가변적이고, 때로는 아픔을 감내하는 용기도 필요하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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