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페이지를 펴던 순간

하루의 가장 느린 순간 #5

by 글쓰는 한큐

해가 떠오르는 시간,

나는 일기를 쓴다.


빈 페이지를 펴고

한 글자씩 적어 나가다 보면

하루가 차오르고

세상이 조금씩 밝아온다.


처음 일기를 썼을 땐

동화처럼 따뜻한 이야기로

가득 채우고 싶었다.

자꾸 다시 펼쳐 보고 싶을 만큼.


하지만 그것은

내 삶의 모습이 아니었다.

웃는 날 뒤에는

헤아릴 수 없는 울음의 날들이 있었고

행복한 날 뒤에는

끝없이 가라앉는 시간들이 따라왔다.


그늘이 있어

지나가는 이에게 품을 내어줄 수 있었고

어두운 새벽이 있어

해는 더 또렷하게 떠올랐다.


그것이

나의 생이었다.


일기장은

나의 영광과 상처가

겹겹이 남아 있는

생의 한 페이지다.


살다 보면

어찌할 도리 없는 일들이 있다.

누구의 탓도 아닌,

그저 그런 일들.


그 앞에서

마음이 오래 붙잡히면

나는 나를 잃어버리곤 했다.


그럴 때

나에게 손을 내미는 것은

내가 써 내려온 나의 기록이었다.


이 또한 지나간다고,

모든 것을 붙잡지 않아도 된다고

수많은 순간을 건너온 내가

지금의 나에게 말해준다.


새로운 해가 떠오르는 아침,

나는 다시

일기장의 빈 페이지를 펼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