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등을 맡겼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by 글쓰는 한큐

삼 년 전, 이맘때 자다 깨서 영주로 가는 버스표를 예매했다.

이유는 지금도 모르겠다.

그저 부석사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4시간 쉼 없이 울리던 업무 연락을

더는 견딜 수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해가 뜨기 전 출발했지만

해가 중천에 떠서야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몇 시간 만에 맡은 바깥 공기는

폐까지 얼릴 만큼 차가웠지만 상쾌했다.


눈이 채 녹지 않은 돌계단을 오르는 일은

고되고 조금은 무섭기도 했다.

동시에 조심히 올라가야겠다는 생각 외에는

모든 생각이 머릿속에서 말끔히 사라졌다.

신기했다.

업무와 근심으로 머리가 무겁던 날들이 잦았는데

온몸에 힘을 주고 발걸음에 집중하는 지금은

오히려 머릿속도 맑고 몸도 아프지 않았다.


눈밭을 사뿐사뿐 걷는 고양이를 만났다.

도시의 골목에서 보던 고양이들은

늘 주변을 살피며 살금살금 움직였는데,

이 녀석은 경계라는 것이 필요 없어 보였다.

눈 위가 차가울 법도 한데

느긋하고 우아하게 걷는 모습이

자꾸만 눈길을 끌었다.


고양이를 따라 걷다 고개를 들자

무량수전이 눈앞에 있었다.

빛바랜 나무 현판에 적힌 네 글자를 보는 순간

기분이 묘해졌다.

고려시대부터 이 자리를 지켜온 건물은

무엇을 품고 있었을까.

수백 년 동안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감각일까.


무량수전의 기와를 받치고 있는

배흘림기둥에 가만히 기대섰다.

투박하지만 부드러운 곡선을 지닌 기둥이

등뼈에 닿았다.

내가 살아온 생을 고스란히

되짚어보는 시간이었다.


기둥을 등진 채 바라본 풍경은

사무칠 만큼 아름답고 고요했다.

며칠 전 내린 눈으로

세상은 온통 새하얗게 덮여 있었다.

모든 상처와 소음을

잠시 덮어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저 멀리 첩첩산중에는

나무가 빼곡히 들어서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나는 얼마나 작은 존재인가 싶었다.

이 작은 내가 가진 고민과 아픔 또한

세상의 관점에서는 얼마나 미미한 것일까.

겸허함이 마음에 차오르자

신기하게도 나를 둘러싼 번뇌가 가라앉았다.


절에서 내려오는 길,

발걸음도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앞으로도 나는

수없이 좌절하고 고뇌할 것이다.

그때마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 서 있던 시간을 떠올리겠지.

세상을 넓게 보았던 그 시간이

나를 다시, 조용히 일으켜 세울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