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진 채로 걷는 연습_2
분명 미색의 매끈한 종이 위에 쓰인 명조체의 검은 글자를 보고 있었다.
눈을 타고 들어온 문장이 머리까지 닿기도 전에 휘발됐다.
읽을 순 있지만, 기억할 수 없었다.
여자는 잡생각이 많아져서 책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뿐이라며 별일 아닌 듯 웃어넘기려 했다.
같은 문장을 벌써 몇 번째 읽고 있는 것인지는 애써 세지 않았다.
하지만 웃음과는 별개로, 마룻바닥에 고인 물을 양말 신은 발로 밟았을 때처럼 축축하고 찝찝한 불안이 마음 한켠에서 자라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주위를 환기시키려 이번에는 일기를 썼다. 생각나는 일상의 이야기를 적어 내려가는데, 펜 끝이 떨렸다.
여자는 자신이 방금 쓴 문장을 기억할 수 없었다.
그 사실을 의식하자, 다음 문장을 쓰는 것조차 어려워졌다. 머릿속이 하얘졌고, 손끝이 먼저 멈췄다.
오랜 시간 켜켜이 쌓인 우울과 불안은 석고처럼 단단히 굳어 여자를 가둬버렸다.
그 사이에 자라난 걱정은 여자에게서 말과 글을 게걸스레 먹어치우며 덩치를 키워갔다.
그들이 커지는 동안 여자는 점점 더 쪼그라들었다.
공벌레처럼 한껏 몸을 말아 넣고,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은 채 조금씩 메말라갔다.
그리고 기어코, 물방울이 바위를 뚫었다.
여자는 버티는 법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말과 글을 잃은 여자는 세상이 낯설고 두려웠다.
삼십 년 넘게 살아온 거리인데도 처음 걷는 곳 같았다.
늘 혼자 참고 이겨낼 수 있다고 믿어왔지만, 이번에는 그 믿음이 끝까지 따라오지 못했다.
도움을 요청할 곳이 없다고 느꼈다.
진정으로 의지할 사람은 없다고, 여자는 오랫동안 스스로를 설득해왔으니까.
늘 그들에게 의지가 되었을 뿐이었다.
여자는 누구에게도 곁을 내어준 적이 없었다.
여자는 무작정 밖으로 나왔다. 병원이 있는 건물들을 찾아 헤맸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발만 움직였다.
‘이 수많은 병원들 중 한 곳은 나를 도와주겠지.’
그렇게 한 곳의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자 시냇물 소리가 들렸다. 은은한 주황빛 조명이 소파를 비췄고, 몇몇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따뜻한 인테리어 속 차가운 표정의 사람들.
그들도 나와 같은 무채색 얼굴이어서, 여자는 이상하게 안도했다.
번호표를 뽑고 소파에 앉았다. 손바닥에 자꾸 땀이 나 번호표가 우그러졌다.
잠시 후, 데스크의 간호사가 여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어떻게 오셨어요?”
여자는 무어라 답해야 할지 한참을 망설였다. ‘걸어왔어요’라고 말해야 하나, 바보 같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고개를 떨군 채 휴대폰을 꽉 쥐고, 한 글자씩 조심스레 내뱉었다.
“저 좀 도와주세요.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