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진 채로 걷는 연습_1
휴대폰 메모장을 켰다.
한 문장을 쓰고 지웠다. 다시 쓰고, 다시 지웠다.
커서만 깜빡이고 손끝은 멈춰 있었다. 애꿎은 유리만 손톱으로 긁어댔다.
아무것도 쓰지 못한 채 검은 화면을 오래 응시했다.
무엇을 쓰려 했는지조차 잊었다.
네모난 액정 한가운데, 부스스한 단발머리와 피곤이 들러붙은 얼굴이 비쳤다. 눈 밑엔 옅은 그늘이 눌어붙어 있었고, 입꼬리는 습관처럼 굳어 있었다. 싱크대에 며칠째 방치된 라면냄비를 떠올리며 자신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어 입꼬리를 잠깐 꿈틀이다 이내 다시 굳어졌다.
웃을 때면 반달처럼 눈이 휘어지던, 초여름의 햇살 같은 미소를 가진 여자는 더 이상 이곳에 없었다.
어디로 갔는지, 언제 사라졌는지조차 모른 채로.
스물다섯의 여자는 몰랐다.
지금의 불안이 끝없이 이어질 것 같아 두려워하던 그때,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았기에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그저 고통의 시간이 빨리 지나가길 바랐다.
“어른이 되면 괜찮아질 거야. 서른이 되면, 그땐.”
세상으로부터 도망치듯 이불 속에 숨고, 숨죽여 울면서 끊임없이 되뇌었다.
조금만 더 버티면 좋은 날이 올 테니, 한 번만 더 참아보자고.
내일의 내가 오늘의 나를 데리러 와줄 거라고 믿었다. 그 믿음 하나로 하루를 견뎠다.
그렇게 버티다 보니 어느새 여자는 그 시절 자신이 그토록 바라던 나이가 되어 있었다.
동화처럼 멋진 어른이 되어, 고민이 마법처럼 사라져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현실은 성냥팔이 소녀의 마지막 성냥이 꺼진 뒤의 거리와 같았다. 눈부신 장면은 잠깐이었다.
손에 남은 것은 차가운 공기뿐. 아무것도 달라진 건 없었고, 오히려 더 많은 것들이 여자의 어깨 위에 얹혔다. 책임은 매 순간 목을 조였다.
여자가 감내해야 하는 역할은 늘어만 갔다. 도망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모든 걸 내팽개치기엔 여자는 너무 오래 “괜찮은 사람”으로 살아왔다. 누군가에게 실망을 안기는 일은, 아직 벌어지지도 않은 죄처럼 두려웠다.
밤새도록 혼자 앓다가도 해가 뜨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나갈 채비를 했다. 베개에 남은 눈물 자국을 손바닥으로 문질러 지우고, 거울 앞에서 얼굴의 표정을 다듬었다. 우울의 향이 짙게 밴 자신을 감추려 향수도 꼼꼼히 뿌렸다.
지하철역으로 내려가는 계단에서부터 이미 숨이 가빠졌다. 출근길 사람들의 어깨가 스치고, 차가운 손잡이를 잡자마자 “오늘은 버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자동으로 떠올랐다.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 사이로, 여자는 몸을 싣고 흔들렸다. 흔들리는 건 열차만이 아니었다.
가족의 연락이 오면 무탈함을 증명하기 위해 정해진 대본대로 연기했다. “응, 괜찮아. 잘 지내.” 문장 끝에 자연스러운 웃음을 얹는 법도 익숙했다. 친구들의 고민을 들어주며 고개를 끄덕이고, 공감을 쥐어짜냈다.
그들의 슬픔은 성심껏 받아주면서도, 정작 자신의 마음은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랐다.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 업무 연락에는 신속하고 정중하게 답장을 썼다.
“확인했습니다.” “추가로 공유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감사의 말이 늘어날수록, 여자의 하루는 더 메말라 갔다. 그 말들 속에 여자의 진짜 목소리는 없었다.
사람들과 함께할수록 사람들로부터 벗어나고 싶어졌다.
아무도 자신을 찾을 수 없고, 휴대폰이 터지지 않는 곳에 숨고 싶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자기 몸 하나 책임지고 살아가는 것조차 버거웠다.
어딘가 털어놓을 수도 없었다. 여자는 자꾸만 “괜히 말해서 상대가 불편해지면 어떡하지”를 먼저 떠올렸다. 미안해하는 마음이 입을 막았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말을 삼킬수록 말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을.
삼킨 말이 늘어갈수록, 여자가 삼켜야 할 약도 늘어갔다.
책상 서랍 한쪽, 가방 안쪽, 침대 옆 협탁 위에 작은 봉지들이 조용히 쌓였다.
“이 정도면 괜찮아질 거야.” 물 한 모금에 털어 넣고, 목을 몇 번 넘겼다.
약을 삼키는 소리가 생각보다 크게 들렸다. 목 안이 쓰라렸다.
몇 봉지씩 털어 넣어도 마음은 끊임없이 요동쳤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기 일쑤였다. 잠이 오지 않는 밤에는 시계 초침 소리가 유난히 선명했고, 그 소리마다 여자의 머릿속은 더 깊은 곳으로 가라앉았다.
내일을 맞이하는 일이 겁났다. 내일이 또 같은 방식으로 올 것 같아서.
오늘이 며칠인지 시간감각조차 잃어버린 채 살던 어느 날, 여자는 책을 펼쳤다.
좋아하는 소설에 몰입해 현실로부터 잠깐이라도 숨고 싶었다. 페이지를 넘기면 다른 삶이 잠시 자신을 대신 살아줄 것 같았다. 그건 여자가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가장 안전한 도망이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문장을 읽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