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진 채로 걷는 연습_5
‘고작 알약 몇 개가 나를 낫게 해준다고?’
여자는 불신이 가득한 혼잣말을 읊조리며 약봉지를 뜯었다.
자신의 이름이 적힌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약을 먹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이라는 낙인이, 종이 위에 먼저 찍힌 것 같았다. 주홍글씨처럼.
약을 먹고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여자는 여전히 잠들지 못했다. 평소와 다른 점이 없었다.
‘거 봐. 역시.’
효과가 없다는 확신이 들자, 마음 한구석이 이상하게 편해졌다. 누군가를 탓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의사는 또 그 사치스러운 책상 앞에 앉아 더 빠른 속도로 키보드를 두드리겠지—그런 생각에 피식 웃으며 여자는 휴대폰을 켰다.
습관처럼 인스타그램에 들어가 팔로잉 계정들의 스토리를 넘겼다. 하트는 누르지 않았다. 같이 기뻐해줄 마음은 들지 않았다.
회사 로고가 박힌 사원증, 연수원, 회사 동기들과의 술자리.
프로포즈 때 받은 명품 가방, 샴페인 잔으로 건배하는 브라이덜 샤워, 파인다이닝에서의 저녁 식사.
공항에서 찍은 여권과 비행기 티켓….
여자를 뺀 세상 사람들 모두가 잘 살고, 행복해 보였다. 사진 속 그들이 너무 환하게 웃고 있어서 속에서 신물이 올라왔다. 휴대폰을 부숴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이 세상은 더 이상 여자가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휴대폰 불빛이 꺼지자 방 안에는 창밖 가로등의 희미한 불빛만 감돌았다. 오토바이 소리와 술 취한 행인의 고함이 간간이 들렸다.
눈을 감자 시계소리가 점점 커졌다. 시간이라는 거대한 괴물이, 날카로운 초침으로 여자의 상처를 긁어대는 것 같았다. 침대는 여자의 사지를 결박해 무력하게 만들었다. 좁은 방 안에서 여자는 서서히 가라앉았다.
고통의 밤이 지나가자, 무기력한 아침이 찾아왔다.
뜬눈으로 밤을 샌 여자는 냉장고를 열어 페트병 하나를 꺼냈다. 뚜껑을 열고 몇 모금 들이켰다. 알코올 냄새가 코끝을 찔렀지만, 여자는 모른 척했다.
속을 알코올로 채워서, 술과 함께 증발하고 싶었다.
잠은 오지 않았고, 대신 몸이 꺼졌다.
저물어가는 석양빛에 여자는 눈을 찡그리며 일어났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나 싶어 휴대폰을 켰지만, 여자를 찾는 연락은 없었다. 대출, 여론조사, 할인 같은 광고 문자만 가득했다.
스팸문자로 가득 찬 휴대폰이, 꼭 자신 같았다.
아직 끝나지 않은 하루가 가슴께를 짓눌렀다. 이런 삶이 영영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아 숨이 막혔다. 감정에 북받친 여자는 팔등으로 눈두덩이를 눌렀다.
자신이 왜 우는지, 지금 이게 무슨 감정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
누굴 향한 원망인지, 무엇 때문에 슬픈 건지, 혼란스러웠다.
그 무엇보다 혼자 견디는 이 상황이 사무치게 외로웠다.
도망갈 곳도 없으면서 도망가고 싶었다. 세상으로부터. 아니, 사실은 자신으로부터.
울음이 조금 잦아들 무렵, 여자는 다시 일어나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펼쳐져 있던 약봉지를 집어 들었다.
‘이 알약 몇 개가, 제발 나를 구원해주길.’
그리고 또 한 번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