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body can save me
생각보다 꽤 어린 시절부터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그만 살아도 되겠다.’
수학익힘책을 풀고 걸을 때마다 수저통이 부딪히는
달그락 소리가 나던 초등학생이 하기엔
다소 낯설고 어색한 생각이었겠지만
그 시절부터 나는 그랬다.
이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아서는 안된다는 것 마저 알고 있었다.
누군가는 별난 꼬맹이라며 웃어넘길 수도 있지만
나를 사랑하는 사람에겐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그 어린 나이에도 나는 알았다.
매달 다가오는 모의고사, 삶의 무게처럼 짓누르던
수많은 참고서와 함께했던 십 대에는
의외로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생사보다
성적표에 찍힌 1이 몇 개인지가 더 중요했다.
이 시절에는 철학적인 생각, 근원적인 생각은 허세고 사치라 생각했다.
퍼석하게 메마른 십 대의 나는
같은 반 친구가 쓰러지면
걱정하기보다 수업분위기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던
비정하고 이기적인 인간이었다.
숱한 밤을 뜬 눈으로 하얗게 지새우던 이십 대의 나는
모든 것을 다 놓고 싶었다.
움켜쥐어봤자 잡히지도 않는데
무엇 하나 놓지도 못하는
나 자신을 미워하고 또 미워했다.
매일 해류와 반대로 헤엄치는 기분이었다.
죽을 만큼 팔다리를 젓는데 계속 제자리,
혹은 후퇴였다.
남들과 나를 비교하지 않으려 발버둥 칠수록
그들과 나 사이의 간극은 선명하고 짙어졌다.
자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들만 바라보며
‘왜 나는’이라는 덧없는 원망과 분노를 쏟아냈다.
애초에 내 것인 적 없는 것들을 보고
왜 내 것이 아니냐며 화를 냈다.
그 모든 화살은 무력한 나 자신을 향했고,
나는 세상에서 나에게 가장 잔인한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살았다.
살아서 삼십 대가 되었다.
우습게도 나를 살린 것은
내가 가진 못난 모습들이었다.
어쭙잖은 착한 아이 콤플렉스가
끝까지 가족을 걱정하며 죽음의 난간에서
나를 끌어당겼고,
열등감으로 가득 찬 속을 감추려던 알량한 자존심이
그럴싸한 조건들을 만들어
사회에서 남보기 부끄럽지 않게
제 몫은 하는 인간으로 만들었으며,
내 안을 가득 채운 독이 삶에 찐득하게 달라붙어
목숨줄을 질기게 만들었다.
머릿속을 비워내는 게 어려울 때마다
노트에 선을 여러 방향으로 그어댔다.
그러다 문득 내가 그은 선이 모인 것을 보게 됐다.
“마이너스(-)가 모이고 쌓여 별(*)이 되었다.”
강점은 내가 따로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더 강해진다.
이미 세상도 그것이 나의 강점임을 안다.
내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약점’이었다.
약점을 가감 없이 마주 보고 분석했다.
자연의 법칙에는 이원성이 있다.
동양에서는 음양의 법칙이라고도 하는.
세상에는 빛과 어둠, 앞과 뒤, 플러스와 마이너스 등
모든 상반되는 성질이 공존한다고 한다.
이를 적용해 보면 내가 생각한 나의 약점은
100% 약점이기만 한 것이 아니게 된다.
그렇다면 내 약점은 어떤 관점에서 봤을 때,
강점이 될 수 있는지 알아야 했다.
그걸 알아내서 나의 매력으로 만들고 싶었다.
모난 부분을 애써 감추거나
억지로 깎아 둥글게 다듬지 않고
온전히 모난 그 자체로 바라보는 연습을 했다.
거울 속 나와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하지 못했던 나는
이젠 웃으며 인사할 수 있는 내가 되었다.
세상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발버둥 쳤으면서
정작 내겐 최악의 사람이었던 것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했다.
나를 아프게 했던 사람, 나를 외롭게 했던 사람,
나를 끝없는 늪으로 처박았던 사람,
그 사람이 바로 나였으니까.
눈물콧물 다 쏟으면서
세상에서 가장 못나고도 솔직한 화해를 했다.
내가 나와의 관계를 회복하는데 20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이제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친한 단짝친구로 살아가려 한다.
때론 다투기도 하고, 삐쳐서 냉전상태로 지낼 수도 있지만 헤어지진 않을 것이다.
나는 깨달았으니까.
내가 그만 살아도 되겠다고 생각했던 순간부터
나를 망가뜨리고, 다시 화해한 지금 이 순간까지
생의 모든 순간
나는 정말 잘 살고 싶었다는 것을.
결국 나를 구하는 것은 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