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나날

돌아오기 위한 여행, 잃어버린 나를 찾아서

by 글쓰는 한큐

그런 날이 있다.

내 안에 맴도는 수많은 말을

끝내 단 한마디로 내뱉지 못하는 날.


그럴 때면 동이 틀 때까지 책상 앞에 앉아

혼자 같은 질문을 되뇌곤 했다.

'이 길은 정말 나의 길일까'


나름 잘하고 있다고 믿는 순간에도

상실과 좌절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그래서 영화 속 주인공 ‘이’를

나는 지나칠 수 없었다.


여행: 뿌리내리지 못한 자들


타국에서, 타국의 언어로 글을 쓰는 이는

늘 여행 중인 것 같다고 말한다.

끝이 정해지지 않은 여행은

설렘보다 공허에 가깝다.


고향을 떠나 있는 나 역시

발이 땅에서 떨어진 채

어딘가를 부유하는 기분으로 살고 있다.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한 채

겉만 맴도는 이방인처럼.


처음엔 그 감각을 자유라 불렀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누리는

해방감과 쾌감은 짜릿했다.

앞날엔 새로운 일만 가득할 것 같았다.


하지만 곧 알게 됐다.

자유와 고독은 늘 함께 온다는 걸.

노력만으로는 메울 수 없는 유대와 근원은

나를 조금씩 지치게 했다.


여행자로 살아가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외로웠다.

어느 순간, 외로움은 나를 삼켜

내 입을 막아버렸다.

그렇게 나는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여행: 잃어버린 말을 찾는 여정


스승의 죽음 이후 이는 여행을 떠난다.

그곳의 첫 풍경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 첫 문장을 떠올리게 한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 가와바타 야스나리 『설국』 중


모든 것이 두텁게 덮인 그곳에서는

말을 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눈은 소리 없이 내리고

세상엔 바람과 물소리만 남아 있었다.


늘 가장 좋은 말을 골라

볕에 고이 말려 전하고 싶었는데

자꾸만 물기를 머금어

눅눅하고 무거워지기 일쑤였다.


하지만 설경을 바라보다 보니

물기어린 말도

저 나름의 의미를 가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는 나와 같은 마음이었을까.

눈 속에 둘러쌓인 낡은 여관에서

다시 연필을 쥐고

잃어버린 말을 종이에 옮기기 시작한다.


여행: 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것


돌이켜보면 여행은

내게 도피이자, 충전이었다.


사람들은 흔히

도망은 비겁하다고 말한다.

나 역시 그렇게 믿어왔다.


하지만 이런 말을 읽은 적이 있다.

도망을 비난하는 건 사람뿐이라고.

사슴이 사자를 피해 달아난다고

누구도 비겁하다고 말하지 않는다고.


그렇다.

여행은 나를 지키는 방법이었다.

억지로 쉼표를 찍지 않았다면

나는 폭주하는 증기기관차처럼

연료가 바닥난 채

철로 한가운데 멈춰 섰을지도 모른다.


잠시 달아나 연료를 채우고

고장 난 곳을 살핀 뒤

다시 돌아올 힘을 얻는 것.

그게 내가 여행을 택한 이유였다.


도망친 곳이 늘 아름답지는 않다.

하지만 한 발 물러서서 바라보면

현재의 문제는 영원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그때서야 비로소

성장의 계단 끝자락에 서 있음을 깨닫는다.


지금 방향을 잃은 듯 느껴진다면

잠시 그곳을 떠나

스스로를 바라봐도 괜찮다.

시야가 넓어지면

마음도 함께 숨을 고른다.

지금 이 밤이 영원할 것만 같아 두려운 당신도

영화 속 ‘이’처럼

끝내 말을 되찾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밤은 물러나고

반드시, 해는 떠오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