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방영되었던 삼성 갤럭시 노트 광고 중에는 어느 회사원의 해외 출장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것이 있다. 스페인 바르셀로나로 출장을 떠난 회사원이 갤럭시 노트를 활용해 멋지게 프레젠테이션을 마친 후 다음 날에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등 도시를 관광하며 다시 한번 갤럭시 노트를 활용해서 즐기는 내용이었다. 바르셀로나로 교환학생을 다녀온 덕분에 도시에 대한 애정이 남달라 져서 바르셀로나가 배경으로 등장하는 모든 것을 각별하게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그 광고가 유독 기억에 남는 이유가 그뿐만은 아니었다.
나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해외 출장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영어 학원 교재에는 해외 바이어나 관련 업체와의 미팅을 다루는 내용이 많았고 자연스레 영어를 잘하게 되면 출장이 잦은 삶으로 귀결되는 줄 알았다. 대학에 와서 영어를 전공하면서는 그러한 삶에 한 발 더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5년이 넘는 직장생활 동안 해외 출장은커녕 국내 출장조차 단 한 번 뿐이었다. 전 세계를 뒤바꿔놨던 코로나 팬데믹 탓을 하고 싶지만 사실 팬데믹이 없었더라도 해외 출장은 없었을 것이다. 해외 출장을 갈 수 없었던 이유가 주변 환경 때문이 아니라 내가 맡은 업무에 출장이 불필요했기 때문이니까.
갤럭시 노트 시리즈가 세상에서 사라지고 난 다음에도 나는 계속 갤럭시 노트를 계속 사용했다. 하지만 광고처럼 해외 출장에 들고 갈 일은 없었다. 결국 해외 출장보다 휴대전화 고장이 먼저 발생했고, 새로운 휴대전화는 노트 기능이 없는, 보다 저렴한 일반 모델이었다. 놀라운 것은 휴대전화를 바꾼 바로 그 해에 처음으로 해외 출장을 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입사한 지 일 년도 채 되지 않았던 때였다. 부서 전체가 쪼개져 각기 다른 나라로 출장을 가게 되었는데 내가 가게 된 곳은 영국 런던이었다. 문제는 유일하게 나만 나 홀로 출장이라는 것이었다. 아직 초짜 사원을 홀로 출장 보내는 것에 대해서 사내 의견이 갈렸다. 너무 무리라는 의견과 이전 직장 경력이 있으니 가능하다는 의견이 팽팽했는데 다양한 여건을 따져본 결과 나 홀로 출장으로 결정 났다.
출장이 늦게 확정된 탓에 빠듯한 스케줄의 항공편을 예약해야 했고 예산도 넉넉하지 않아서 운 좋게 반값 할인하는 호텔을 찾지 못했다면 호스텔에서 지낼 뻔했다. 결과적으로는 문제없이 준비를 끝내서 밤 비행기를 타고 런던으로 향했다. 런던이 처음은 아니었다. 교환학생으로 지내는 동안 런던으로 짧게 여행을 갔었다. 배낭 하나만 메고 떠났던 3박 4일의 여행. 이번에는 출장으로 찾는 런던이었지만 이번에도 배낭을 메고 갔다. 출장에 웬 배낭인가 싶겠지만 런던에 도착해서 짐 찾는 시간을 아끼기 위한 선택이었다.
히드로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숨 돌릴 틈 없이 지하철을 타고 리버풀 스트리트역으로 넘어가야 했다. 런던 교외 지역으로 가는 기차를 타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작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하필 내가 타야 하는 엘리자베스 라인이 파업한다는 것이 아닌가! 한참을 기다려 겨우 탑승했지만 파업으로 인해 겨우 패딩턴역까지만 운행한다고 했다. 낯선 런던 지하철에서 계획에도 없는 환승 하랴 혹시 소매치기를 만나지는 않을까 긴장하랴 정신없는 와중에 마침내 리버풀 스트리트역에 도착했다.
평일 한낮의 기차는 매우 한가했다. 한 칸에 앉은 사람이 5명이 채 될까 말까였다. 가방을 꼭 끌어안은 채 열차 창밖으로 분주한 플랫폼을 바라보고 있는데 맞은편에 외국인 한 명이 와서 앉았다. 그는 기차가 출발하기도 전에 노트북부터 펼치더니 바쁘게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이 사람도 출장 가는 길인가? 그는 기차가 달리는 내내 창밖 한 번 보지 않고 노트북만 들여다보다가 나보다 하나 빠른 역에서 다급하게 짐을 챙기더니 내렸다.
한 여름이었지만 영국의 날씨는 시원했다. 이례적인 무더위가 이어지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런던에는 이례적으로 시원한 날씨가 이어지고 있었다. 기적처럼 시원한 여름 바람을 맞으며 호텔방에 도착해 가방을 내려놓자 이제야 안심이 됐다. 여름이라 해가 늦게 지는 덕분에 다시 나가서 짧은 산책을 즐겼다. 영국의 선선한 여름 속을 걷고 있으니 대학 때 잠깐 배웠던 셰익스피어의 소네트가 떠올랐다. 이렇게 쓰고 보니 조금은 작위적여 보이지만 진심으로 그날 나는 문자로만 봤을 때는 실감 나지 않던 환상적인 여름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다음 날은 어제보다 날씨가 더 좋았다. 하늘은 푸르르고 바람은 시원한 전형적인 초가을 날씨였다. 조식은 호텔과 연계된 카페에서 먹을 수 있었는데 사실 큰 기대는 없었다. 카페는 한가했고 대부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내가 조식 쿠폰을 건네자 직원은 조식과 함께 나오는 음료와 빵을 선택할 수 있다고 했다. 짐작으로 메인은 단일 메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일단 커피는 골랐는데 빵이 고민이었다. 직원이 말하는 White와 Brown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불확실한 투로 Brown이라고 답한 후에도 도대체 갈색 빵이 무엇일지 궁금했다.
그릇에 담긴 바삭한 빵을 보고서야 토스팅한 빵이 Borwn이라는 것을 알았다. 빵과 함께 라즈베리 잼이 나왔는데 진짜 메인은 같이 나온 커다란 접시였다. 그릴 자국이 뚜렷한 두꺼운 베이컨, 통통하고 짭조름한 소시지, 구운 토마토와 버섯, 영국 느낌이 물씬 풍기는 해시 브라운과 베이크드빈까지. 게다가 그 옆에 쌓여 있는 부드러운 스크램블 에그마저 보고 있으니 군침이 돌고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비주얼부터 맛까지 완벽한 아침식사가 끝나갈 쯤에는 내일 아침이 기다려졌다. 식사를 마친 뒤 커피를 마시며 그날 있을 미팅 내용을 정리했다. 첫 해외 출장에서의 첫 미팅이라 걱정과 긴장이 뒤섞였던 탓에 자료를 복습할 수밖에 없었지만, 서류를 읽고 있는 내 모습이 어렸을 때부터 꿈꿔왔던 직장인의 모습 같아서 가슴이 벅찼다.
또 한 번의 푸짐한 아침식사가 지나고 다시 런던으로 돌아왔다. 출장 일정 동안의 모든 미팅은 순탄했다. 미팅 업체들은 다들 젠틀했고 나의 방문을 굉장히 반가워했다. 앞으로의 협력이 더 두터워지길 바라며 양쪽에 이익이 될 만한 얘기가 오갔다. 드디어 모든 일정이 끝났다. 현재 시각은 아직 오후 2시. 다음 날 오후 비행기를 탈 때까지 자유 시간이었다. 나는 가벼운 차림으로 호텔을 나와 런던 시내로 향했다. 코벤트 가든 앞에서는 여전히 버스킹 공연이 한창이었고 타워브리지는 오늘도 붐볐다. 타워브리지에 서서 런던 타워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마침내 갤럭시 노트 광고 같은 출장을 가게 됐다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 오르자마자 저항할 새 없이 잠들었다. 긴장이 풀려서인지 너무 피곤했다. 긴 잠에서 깼을 때는 기내식이 제공되는 중이었고 나는 마치 그 사이 영국 문화에 물들기라도 한 듯 차에 우유를 넣어 마셨다. 비행기에서는 한창 영국인 놀이를 하더니만 한국에 도착해 먹은 첫 끼는 매콤한 숯불 제육볶음이었다. 느끼한 음식을 잘 먹는 편이라 여행 가서도 매콤한 음식이 떙겼던 적이 없었는데. 한국에 오자마차 고추장 팍팍 들어간 음식을 찾는 걸 보면 이제 나도 나이가 들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