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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실 Sep 11. 2024

정규직 세 끼 - 모름지기 회식은 점심회식이죠

새로운 팀과의, 그리고 새로운 팀장과의 점심식사

입사 첫날, 인사담당자와 점심식사를 먹은 후 회사 휴게실에서 차 한 잔을 마시고 있었다. 그때 어떤 남자 직원 한 명이 무심하게 우리 옆을 지나갔다. 퉁명스러운 표정에 눈빛마저 싸늘해서 선뜻 먼저 말을 걸기 어려운 인상이었다. 인사담당자가 먼저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했지만, 무표정한 직원은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휴게실을 나갔다. 알고 보니 그 사람은 다른 부서의 팀장이었다. 1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만남이었지만 '제발 저분이 내 팀장이 아니길.'이라고 바랐다. 다행히도 배정받은 부서의 팀장은 회사 내에서도 부드러운 심성으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적어도 1년은 상사 걱정 없이 다닐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갑작스러운 조직 개편이 내 예상을 깨버렸다.


조직 개편이 필요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내가 입사했던 시기가 우리 팀이 가장 바쁜 때였다고는 하지만 사실 우리 팀이 담당하고 있는 업무는 자투리를 모아놓은 것처럼 중구난방으로 뒤섞여 있었다. 새로 구성된 팀은 우리 팀의 업무 일부를 넘겨받았고 나는 기존에 하던 업무의 절반을 이고 새로운 팀으로 옮겨갔다. 이제 막 수습기간을 마쳤던 나는 회사 내 정보력이 부족했고 새로운 팀의 팀장이 누구인지도 전 공지가 뜨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어차피 기존에 하던 일을 하는 거니 누가 팀장으로 오든 상관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입사 첫날 마주쳤던 차가운 인상의 팀장 이름이 적혀 있는 것을 보자마자 생각이 바뀌었다.

 



내가 기억하는 팀장과의 첫 만남을 팀장은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설령 기억하고 있다고 한들 굳이 언급해서 인연의 끈을 이어갈 생각도 없었을 것이다. 팀장이 내 이름만 불러도 가슴이 쿵 내려앉을 정도로 긴장했던 날들이 1년 가까이 이어졌다. 그 기간 동안 파악한 바에 따르면 팀장은 쓸데없는 잡담으로 친밀을 쌓는 성격이 아니었다. 1년 동안 팀장과 나눈 잡담이라고는 퇴근 후에 뭐하는지 물어본 것이 전부였다. 그마저도 같은 팀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어색하던 시절, 외부 업무를 마치고 회사로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나란히 걷게 되자 팀장이 침묵을 뚫고 유일하게 건넨 질문이었다.


퉁명스럽게만 보이던 팀장이 내게 먼저 말을 걸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첫 질문이 퇴근 후의 삶이라는 점이 더욱 놀라웠다. 공공기관이라 워낙 조심스러운 건지는 몰라도 전체적으로 사적인 영역에 대한 질문을 철저히 금하는 분위기였다. 남자친구, 여자친구의 유무를 묻지 않는 것은 당연하고 서로의 나이조차 알지 못했다. 그렇다 보니 조금이라도 실례되거나 불편하게 생각할 만한 질문은 아예 떠올리지도 않았다. 이름만큼 자연스러워진 MBTI조차도 마치 개인 휴대전화 번호를 물어보는 것처럼 더듬더듬 물어본 동료도 있었다. '평생 볼 사이'라는 말로 친분을 강요했던 이전 직장과는 너무나도 다른 분위기였다.




회사에서 사적인 친분을 쌓는 것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의견이 다르다. 누군가는 사적인 친분이 업무에 도움을 준다고 주장하지만 다른 누군가는 사적인 친분은 불필요하다고 말한다. 나는 이제까지의 직장에서 일부 동료들과 사적인 친분을 쌓았지만 그게 반드시 필요하다는 입장은 아니다. 그저 내게 그럴 기회가 있었을 뿐, 사적인 관계로 발전될 기회가 없는 이번 직장에 불만은 없었다. 그동안 내가 직장에서 동료들과 어떤 관계를 유지했는지 알고 있는 가족들과 친구들은 내가 정반대의 분위기에 적응하기 힘들어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나는 오히려 그들의 걱정이 더 놀라웠다. 잡담이 전혀 오가지 않는 사무실 분위기도, 혼자 먹는 점심식사도 충분히 즐길만했고 오히려 평온함을 느꼈다.


팀 회의가 분기별 행사보다 드문 우리 팀이지만 팀의 친목 도모용으로 지급되는 부서운영비를 사용하기 위해 가끔 회식을 했다. 회식이라 하면 대부분 퇴근 후 이어지는 술자리를 상상하겠지만 우리 팀의 회식은 무조건 점심시간에 이루어졌다. 철저하게 개인 시간을 침해받지 않으려는 사원들의 꼼수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의외로 점심회식을 주장한 사람은 칼퇴를 너무나도 소중히 여기는 팀장이었다. 나를 포함한 일개 사원들은 점심회식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고 자연스레 '회식은 당연히 점심시간에!' 굳졌다. 새로운 팀이 조직된 지 3개월 후 신입직원까지 들어오면서 제법 팀이 안정되자 팀장이 첫 회식을 주도했다.




회식 장소는 회사 주변 맛집을 꿰고 있는 직원 한 명의 추천으로 정해졌다. 회식 장소라 하면 기본적으로 다인원을 수용할 수 있어야 하고 예약이 가능해야 하는 법! 회사 밀집 지역의 경우 예약 없이도 점심 장사가 잘 되기 때문에 의외로 점심 예약을 받지 않는 가게가 많다. 그래서 은근히 회식 장소를 고르는 것이 까다롭다. 회사에서 걸어갈 만한 거리에 위치한 곳 중 직원들이 자주 가는 가게는 피하고 가격 적정선을 맞춘 끝에 유명 쇼핑몰에 있는 동남아음식전문점으로 결정되었다.


가게는 지하에 있었지만 조명으로 밝기를 최대한 높였고 곳곳에 (비록 모형이지만) 파파야나무를 심어놔서 동남아 분위기를 냈다. 메뉴는 저렴한 식당에서도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식사류와 가격대가 높은 가게에서만 볼 수 있는 요리류로 구성되어 있었다. 우리는 식사류에서 일인당 하나씩 골랐고 요리류에서도 하나를 주문했다. 식사는 국수와 밥으로 나뉘었는데 대부분 팟타이(볶음면)와 볶음밥을 주문했다. 요리로는 개수를 딱 맞춰 먹을 수 있는 시리얼 새우를 골랐다.



음식이 나왔을 때 우리 모두 당황했다. 요즘 같이 가격은 높이고 양은 줄이는 시대에서 보기 힘든 비주얼이었기 때문이다. 가격이 저렴한 편은 아니었지만 비슷한 가격대의 다른 식당보다 양이 현저하게 많다. 식사 메뉴가 하나씩 눈앞에 놓일 때마다 다들 '우와!'라는 순수한 감탄사를 반사적으로 내뱉었다. 심지어 시리얼 새우의 새우마저도 한 마리가 손바닥 절반 크기라서 일인당 하나씩 밖에 먹을 수 없는 상황에서도 아쉽지 않았다. 짭조름하고 담백한 맛이 조화로워서 그 많은 양을 뚝딱 끝낼 수 있었다.

  



식사를 하면서 처음으로 개인적인 이야기가 오갔다. 주제는 퇴근 후에 뭘 하고 지내는 지였는데(이번에는 팀장님이 꺼낸 질문은 아니었다) 팀원들의 퇴근 후 생활은 예상보다 훨씬 다양하고 바빴다. 제일 높은 비율로 운동을 하는 사람이 많았다. 어떤 사람은 필라테스를, 또 다른 사람은 PT를 받는다고 했는데 나처럼 피트니스센터에서 혼자 운동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 외에도 악기를 배우거나 제2외국어를 공부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전 직장까지만 해도 퇴근 후의 시간을 알차게 보내지 못했다. 늘 이직의 굴레를 쓰고 채용공고를 뒤적이거나 입사원서를 쓰는 데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구직 앱을 삭제하는 것으로 이직 루트를 졸업하면서 퇴근 후가 온전히 내 시간이 되었다.


어떠한 죄책감이나 찜찜한 기분 없이 퇴근 후를 여러 활동으로 채울 수 있다는 것은 당연히 기분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론 열심히 일하고 나서도 뭔가를 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끼는 나 자신이 안쓰러웠다. 퇴근 후의 시간을 알차게 보내지 않으면 남들보다 뒤처질 수 있다는 생각에 불안하거나, 시간을 낭비한다는 생각에 스스로를 한심하게 여겼다. 내가 차지한 이 자리가 대단한 자리는 아닐지 몰라도 결코 쉽게 얻지는 않았다. 나름 열심히 달려서 드디어 도달했는데 왜 여전히 만족하지 못하는 걸까? 팀원들의 얘기를 들으며 나 자신을 더 채찍질했다. 여가 시간에 대한 집착은 충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부족함을 줄이기 위한 분투였다.




팀장과 함께 일한 지 일 년이 지나고 나서야 팀장의 성격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팀원과의 친분에 관심이 없고 무뚝뚝한 것은 그대로였다. 하지만 그 말은 친분에 기대어 일을 미루지 않고 허접잖은 농담으로 업무 시간을 의미 없이 보내지 않는다는 의미도 되었다. 물론 여전히 불편하고 어색한 순간은 있었지만 전보다 많이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우연한 기회로 팀장과 단둘이 식사를 한 적이 있었다. 사실 팀원들 모두 한 번씩은 팀장과 단둘이서 점심을 먹었기 때문에 내심 한 번은 나도 그런 시간을 갖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막상 단둘이 한 테이블에 앉 조금은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우연한 기회로 차려진 오붓한 점심식사는 생각 외로 아주 재밌었고 무엇보다 팀장이 적극적으로 대화를 주도했다. 업무 관련 얘기는 단 하나도 오가지 않았다. 퇴근 후 얼마나 알찬 시간을 보내는지에 대해서도 얘기하지 않았다. 오로지 서로가 좋아하는 것, 감동받았던 경험, 순수했던 시간들에 대해서 얘기했다.


아주 개인적인 얘기들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누구도 불쾌하지 않고 즐겁기만 했다. 회사에서 보낸 점심시간 중 가장 풍성하고 다양하고 순수했던 시간이 가장 두렵고 불편했던 상사와의 점심식사라는 것은 매우 의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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