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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실 Sep 04. 2024

정규직 두 끼 - 오늘은 대리님, 내일은 팀장님

뒤늦은 환영식사

입사 첫 주에 같이 점심을 먹었선배의 말대로 내가 입사했던 때는 우리 팀이 가장 바쁜 시기였다. 이곳의 문화에 따르면 보통 신입직원이 들어오고 1~2주 내로 팀 환영식사를 한다고 했다. 하지만 하필 내가 들어왔을 즈음에는 환영식사를 할 틈이 없어 가벼운 티타임으로 대신했다. 다들 내가 서운해하지는 않을지 혹시 오해하지는 않을지 걱정했지만 이전 회사에서는 환영 식사라는 문화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신경 쓰이지 않았다. 오히려 각자 점심을 먹는 분위기 속에서 환영 식사가 존재한다는 것이 놀라웠다.


내가 입사한 시점부터 회사에서 새롭게 시작한 정책이 있었다. 이름하여 멘토-멘티 제도. 신입직원이 들어오면 같은 팀의 선임을 멘토로 지정하는 제도다. 멘토가 된 선임은 수습기간 동안 멘티에게 업무와 회사생활에 관해서 알려주고, 멘티는 매주 수습일지를 작성해서 멘토에게 검사받아야 한다. 나의 멘토는 옆자리에 앉은 대리님이었다. 드라마 '미생'으로 회사생활을 공부한 탓에 멘토에 대한 무게감이 남달랐다. 어떤 성향의 대리를 멘토(드라마에서는 사수)로 만나느냐에 따라서 수습기간뿐만 아니라 나와 회사의 관계가 결정될지도 몰랐다.



   

다행히도 대리님은 좋은 분이었다. 질문에 친절하고 자세하게 답해주는 것은 물론이고 서류나 이메일 작성을 요청할 때면 작년에 작성되었던 동일한 서류를 참고 자료로 보내줬다. 행정 업무 경력이 있어도 회사마다 상사마다 문서 작성 스타일이 다르기 때문에 대리님이 보내줬던 자료들은 실무에 도움이 되었다. 대리님의 가장 큰 특징이자 닮고 싶은 부분은 조심스러운 말투였다. 내가 작성한 문서에서 실수를 발견하더라도 절대 '이거 틀렸어요.'라고 말하는 법이 없었다. 대신 '이 부분 한 번 더 보셔야 할 것 같아요.'라는 말로 돌려서 얘기했다. 돌려서 말하는 것을 잘 못하는 편인 내게 대리님의 말투는 특히 인상적이었다. 드라마를 보며 키워왔던 멘토에 대한 우려는 대리님을 만나면서 깔끔하게 해결되었다.


대리님과 내가 멘토-멘티 사이가 되었다는 것을 안 지 얼마 안 됐을 때쯤 대리님이 같이 점심을 먹자고 했다. 식사를 하러 가는 길에 대리님은 내 나이를 알게 되었는데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막내 동생과 내가 동갑이라고 했다. 대리님의 막냇동생 덕분에 덩달아 나마저도 갑자기 애기와 후배 직원 그 사이쯤이 되었다. 서른이 넘은 후로는 사회에서 만난 사람에게 애기 취급을 받을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진짜 막내였을 때는 '우리 팀에서 누가 막내지?'라는 질문이 상당히 거슬렸는데 '막내'와 '애기'라는 단어도 오랜만에 들으니 반가웠다.




도착한 가게는 해산물 전문 한식당이었다. '해산물'과 '한식당'이라는 단어가 붙는 음식점을 앞장서서 찾아가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던 시절이 있었다. 몇 번이나 고사하다가 먹었던 곰탕처럼, 내가 육회를 먹게 되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던 가족들처럼, 해산물 한식당에서의 식사는 입맛이 변했다는 상징 중 하나였다. 가게번화가에 있는 것 치고는 좌석이 여유로웠다. 주변의 다른 가게들은 대기까지 있을 정도인데 이곳만은 기다리지 않고 바로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메뉴판을 자세히 보지도 않고 대리님의 추천에 따라 주꾸미 덮밥을 주문했다. 대리님은 생각보다 맵다고 미리 경고하면서도 이 가게에 오면 주꾸미 덮밥만 먹는다고 말했다. 매워도 먹고 싶어지는 주꾸미 덮밥에 대한 기대가 배고픈 만큼 커졌다. 마침내 밥과 따로 나온 새빨간 주꾸미 볶음은 맛보지 않아도 맵기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도 용감하게 양념까지 싹싹 긁어서 밥그릇에 붓고 잘 섞이도록 비볐다. 밥이 점점 빨개지면서 맵기도 어느 정도 중화됐을 때쯤 숟가락에 꼭꼭 담아 한 입 크게 먹었다. 대리님 말대로 입안이 살짝 얼얼할 정도의 매운맛이었다. 곁들여 나온 미역국을 한 숟갈 떠먹으니 얼얼함이 가라앉았다. 덮밥과 미역국을 번갈아 먹으며 매웠다가 진정됐다가 다시 매웠다가를 반복하는 미식의 자학을 자행했다.



대리님은 우리 둘의 점심값을 내면서 회사 주변 음식점에서 할인받는 꿀팁도 알려줬다. 인근 회사에 다니는 것만 증명하면 무려 10%나 할인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그다음부터는 점심 메뉴를 정할 때 할인받을 수 있는 가게인지도 살펴보게 되었다. 사가 위치한 지역은 직장인 점심물가 1위로 꼽히는 강남 한복판이다. 하지만 월급은 주변 물가에 비례하지 않는다. 언제 적 물가를 기준으로 책정된 지 모를 식대로 점심식사비를 충당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이렇다 보니 저렴한 식당을 찾아내거나 각종 방법으로 저렴하게 결제하는 것이 능력이 되었다.




큰 실수 없이 수습기간이 지나고 정직원 발령 소식이 전공지에 올라왔다. 그와 동시에 내 생활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왕복 4시간의 긴 통근 시간을 더 이상 견디기가 어려워 자취를 결심하게 된 것이다. 2주 동안 퇴근 이후나 주말에 시간을 내어 집을 보러 다녔다. 총 5곳을 다녀본 후에 최종 결정을 내린 날, 점심시간 직전에 부동산 중개인에게 연락해서 마지막으로 본 집을 계약하겠다고 말했다. 중개인이 보낸 문자를 확인하고 계약금을 보내려는데 회사 메신저로 느닷없이 팀장님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점심 약속 없으면 같이 먹을래요?' 나는 빠르게 계약금을 보내고 팀장님을 따라나섰다.


우리가 간 곳은 연식이 있어 보이는 돈가스 가게였다. 팀장님은 내가 입사한 지 4개월이 되도록 점심 한 번 사주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려 올해가 가기 전에 같이 밥 한 번 먹고 싶었다고 말했다. 팀장님이 신입직원이고 지금의 부장님이 대리님이던 시절 같이 와서 밥을 먹었던 곳이 바로 여기라는, 숨겨진 역사도 들려주었다. 나는 돈가스를 먹으며 자취를 하기로 했다고 얘기했는데 알고 보니 팀장님은 자취계의 고수였다. 기숙사, 하숙, 셰어하우스, 고시원, 원룸 등 오피스텔을 제외한 웬만한 주거 형태에서 자취를 해봤다고 했다. 팀장님은 내가 미처 생각지도 못한 자취 팁들을 알려주었고, 나는 돈가스를 꼭꼭 씹으며 팀장님의 팁들도 꼭꼭 저장해 두었다.


돈가스는 회사가 있는 동네의 다른 가게들과 비교했을 때 가격이 저렴한 편이었다. 경양식과 일식을 섞은 묘한 퓨전이었는데 양이 많아서 아쉽지 않게 먹을 수 있었다. 우리는 식사를 마치고 가게를 나와 카페로 이동했다. 회사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회사 인근 카페였다. 낮에는 카페지만 밤에는 와인바로 변하는 곳이었는데 커피와 와인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것으로 유명했다. 점심을 먹고 커피를 사러 왔다가 사장님이 건넨 와인을 시음하곤 마음에 들어 와인을 한 병 사가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 해 연말은 회사 안팎으로 바쁘게 보냈다. 회사에서는 기지개 한 번 제대로 켤 새 없이 일하다가 퇴근하면 자취방에 들어갈 가구나 살림살이를 찾아보다가 잠들었다. 휴가는 은행 업무를 보고 이삿짐을 싸는 데 다 써버렸고 회사 직원 절반이 쉬었던 그 해 마지막 날에도 출근해서 업무를 마무리했다. 쉴 틈 없는 연말을 보내고 새해가 되자마자 첫 번째 주말에 자취방으로 이사했다. 사는 곳을 시작으로 대중교통, 주변 편의시설, 회사와의 거리 등 모든 것이 바뀌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회사에서도 환경이 바뀌었다. 새해부터 새로 생긴 신생 팀으로 이동하게 된 것이다. 출근 첫날, 새로운 팀장님과 마주한 순간 '하필이면.'이란 생각을 하며 쉽지 않은 해가 될 것을 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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