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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실 Aug 21. 2024

공무직 다섯 끼 - 3년 넘게 다닌 회사를 떠나는 날

공무직으로서의 마지막 점심식사

이직이 쉬운 것은 아니었다. 난이도의 문제라기보다는 이직을 위해 또다시 취준 상태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피곤했다. 매일 아침마다 채용 공고를 뒤지고 원서를 쓰고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려야 하는 삶을 반복해야 하다니. 근로계약서에 적힌 근로기한이 '법에 명시된 정년'이라고 적혀 있는 것을 봤을 때 당연히 이곳이 나의 평생직장이 될 줄 알았다. 몇 년 동안 휴대전화에 깔려 있던 채용정보 앱을 삭제했을 때는 성취감을 넘어서 후련했다. 그랬던 내가 겨우 몇 개월 만에 다시 채용 정보 앱을 다운로드할 줄이야. 이래서 사람 일은 장담하면 안 된다고 했던가.


채용정보를 살펴보는 마음은 날마다 들쭉날쭉했다. 어떤 날에는 아침부터 기분이 상쾌해서 이유 없이 열정이 넘쳤다. 채용 정보 사이트에 올라와 있는 수많은 채용공고가 전부 가능성처럼 보였다. 내가 갈 수 있는 곳이 이렇게나 많다니! 그런 날에는 단 하루 만에 스크랩함의 페이지가 넘어가곤 했다. 그러나 어느 날은 이 모든 것에 회의감이 들었다. 나는 언제까지 채용공고를 뒤적이며 살아야 할까? 새로운 직장에 들어가면 과연 만족하고 다닐 수 있을까? 다시는 이직하지 않을, 평생직장을 찾고 싶은 마음으로 채용공고를 뒤적이면서도 그 마음 자체에 지쳐버렸다.




이직 자체에 대한 결정이 하루에 수십 번도 더 바뀌었다. 입사한 지 얼마 안 됐을 때는 아직 업무가 익숙하지 않아서라는 핑계를 댔고 부서 이동 후에는 새로운 부서가 낯설어서 그런 거라며 이직을 단념해보려고도 했다. 뭔가가 변하면 겪게 되는 의례적인 감정일 뿐이라면서 지금 직장에 적응하려고 노력했다. 확신이 드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일을 하면서 확신을 가지는 것도 틀린 것은 아니라며 자기 합리화 또한 시도했다. 단념과 합리화 뒤에는 취업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직을 결심한 허무함과 이직에 성공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제 4년 차 직장인이 되었지만 과연 그동안의 경력이 전부 의미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 자신이 없었다. 소위 '물경력'이라는 것이 나의 직장 경력을 가리키는 말이 아닌가 의심하게 됐고 어느 정도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도 한 기관에서 일한 지 3년이 지나자 일하고 있는 업무가 어떻든 회사에서 받는 대우가 어떻든 상관없이 익숙해져 버린 것이 문제였다. 다시 새로운 곳으로 가서 적응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두려웠다. 이런 고민을 동료들에게 털어놓을 때면 반응은 두 부류로 갈렸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분들은 젊은 사람이 무슨 그런 소리를  하냐고 했고 내 또래는 공감하면서도 지금에 안주하는 것은 비겁하다는 것으로 의견이 모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 그대로 이러한 모든 걱정과 불안에도 불구하고, 이직을 결심한 이유는 나 자신의 변화 때문이었다. 공무직으로서의 차별 대우와 책임회피형 상사들과 일하면서 나 스스로가 변하는 것이 느껴졌다. 차별에 대한 반감에 익숙해져서 사소한 것에도 예민해졌고 쉽게 내 한계를 설정해 버렸다. 3년 전까지만 해도, 이 회사에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대학교 때는 매사 긍정적이어서 반대로 부정적인 친구들에게 용기를 주는 사람이었다. 그랬던 내가 이제는 매일 불만을 쏟아내고 다른 사람의 저의를 의심하게 된 것이다. 도대체 어쩌다 이렇게 변한 걸까?


이보다 더 늦어지면 눌러앉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서 이직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채용 공고를 더 열심히 뒤졌고 전업으로 취업 준비를 하던 때처럼 일주일에 2개씩 원서를 쓰며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언제 보러 갈지 모르는 면접을 위해 휴가도 아꼈다. 나의 중심은 이직이었다. 놀라우면서도 당연한 것은 이직을 생각하는 사람이 나뿐만이 아니었다는 거다. 공무직 사이에서 이직은 유행이다 못해 문화로 자리 잡았다. 나와 친하게 지냈던 공무직 동료들 중 절반이 떠났고 남아있는 공무직들도 이직을 준비하고 있었다.




열심히 하면 우주의 기운이 몰린다는 말이 정말 맞는 걸까? 이직에 혈안이 되어있을 때 마침 내가 대학교를 졸업할 때부터 가고 싶어 했던 공공기관의 정규직 채용 공고가 올라왔다. 이것이야말로 운명이었다. 성심성의껏 최선을 다해 원서를 쓰고 간절한 마음을 담아 접수했다. 서류에 합격한 이후부터는 저기가 내 자리라는 직감이 왔다. 이후 이어진 필기시험, 영어면접, PT 면접, 일반 면접을 거치면서도 떨리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감이 넘쳤고 잘 볼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채용 절차를 모두 거친 이후 최종합격 발표가 나는 날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긴장했다.


합격자 발표가 던 날은 평일이라 평소대로 출근했다. 최대한 무심하게 하루를 보내고 싶었지만 발표 시간이 다가올수록 긴장이 고조됐다. 심장박동이 내 귀로 전해졌고 심장에 앞서 고막부터 터져버릴 정도로 떨렸다. 합격자 공고를 클릭할 때는 어떤 결과든 괜찮다며 스스로에게 예방주사를 놨다. 마음의 준비를 하기도 전에 합격자에 적힌 내 이름과 수험번호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감격한 나머지 손이 더 떨리고 심장이 더 요동치기 시작했다. 기쁨보다 긴장을 푸는 것이 먼저라 깊고 느리게 숨을 뱉었다. 차분하게 나 자신을 토닥이고 칭찬한 뒤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먼저, 근무시작일과 필요한 서류를 살피고 가족들에게 알렸다. 그리고 팀장과 부장보다도 친하게 지냈던 동료들에게 이 사실을 먼저 알렸다. 나의 롤모델이기도 했던 중년의 공무직 동료는 잠깐 볼 수 있냐는 나의 문자만 보고도 직감을 했단다.




근무 마지막 날, 롤모델 공무직 동료를 포함해 친하게 지냈던 사람들과 같이 점심을 먹었다. 내게 공무직으로서의 마지막 점심식사 메뉴를 고를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다. 당연히 인생 최고의 맛집인 돈가스 가게를 가려고 했지만 하필 그날 점심시간이 조금 촉박했던 터라 회사에서 가까운 가게로 가야 했다. 식사장소를 고르기 위해 밤하늘보다 별이 많은 지도앱을 살펴보다가 롤모델 동료가 소개해줬던 중식당이 보였다. 가지튀김을 썩 좋아하지 않던 내가 롤모델 동료의 강요에 가까운 추천에 못 이겨 처음으로 가지 덮밥을 먹었던 곳이었다. 경험 삼아 먹어보려던 거였는데 막상 먹고 나서는 나의 최애 중식 메뉴가 되었다. 이곳이라면 점심 메이트들 모두 불호 없이 다 좋아할 거라고 확신했다.


예상대로 점심식사 메뉴 선정은 탁월했다. 평범한 쌀밥에 무심하게 올라간 가지볶음에는 불향이 배어있었다. 달짝지근하면서도 매콤한 소스에는 갖은 채소가 잘게 썰려 있었다. 가지의 겉면을 감싸고 있는 얇은 튀김옷은 소스와 어우러져 꾸덕하게 바삭했고 가지 속은 부드러웠다. 3년 동안 회사를 다니면서 마지막 6개월쯤에야 이 가게를 알게 된 것이 안타까울 정도의 맛이었다. 푸짐한 가지덮밥을 깨끗이 끝낸 후 카페로 이동했다. 롤모델 동료는 나의 이직을 축하한다는 의미로 모두에게 커피를 쐈다. 다른 동료는 나 몰래 카페에서 파는 비싼 초콜릿을 사서 내게 축하선물로 건넸다. 나는 고마워 어쩔 줄 몰라하며 "선생님들 때문에 관두기가 싫을 정도예요."라고 말했다.





그 말은 진심이었다. 속이 부글부글 끓는 공무직 생활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마음 맞는 동료들 덕분이었다. 어렵고 불합리한 일은 같이 헤쳐나가려 하고 답답할 때는 시원하게 회사 욕도 하면서 서로를 위로하고 웃게 했다. 그 시간들이 공무직으로서 가장 좋은 기억이었고 이직을 주저하게 했던 이유이기도 했다. 새로운 회사에서도 이만큼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까? 결국 같이 일하는 사람이 중요한 건 아닐까?


하지만 인생을 길게 보고 불안과 걱정을 극복하기로 했다. 사람도 중요하지만 내 인생에서 커리어도 그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중요하다고 믿었다. 내가 좋은 사람이라 좋은 사람들이 몰린 거라면 다음 직장에서도 그럴 거라는 야심찬 희망을 걸었다. 그렇게 끝날 것 같지 않던 공무직 인생도 끝이 났다. 그리고 마침내 5년 넘게 간절히 바랐던 정규직으로서의 삶이 눈앞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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