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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실 Aug 14. 2024

공무직 네 끼 - 최고의 돈가스 맛집을 만나다

단 한 입으로 인생 최고의 맛집이 되다

회사에서 연차가 쌓이는 만큼 회사에 대한 불만도 쌓여갔다. 공무직이라는 직위는 직무 성과를 온전히 인정받는 것에도 방해가 되었다. 영원히 아랫사람으로 남아야 하는 공무직으로서 윗사람들이 공을 가로채는 모습을 보며 '나중에 나도 확 저래버릴까?'라는 파렴치한 생각이나 '나는 저렇게 되지는 말아야지.'라는 건설적인 생각조차 허락받지 못했다. 당연히 직업 만족도는 떨어지고 있었고 그와 비례하게 삶에 대한 만족도 또한 점차 떨어졌다. 직장이 그토록 만족스럽지 않다 보니 다른 곳에서라도 만족과 보람을 찾아야 했다.


그렇게 해서 찾은 돌파구는 맛집 탐방이었다. 점심시간 동안 갈 수 있는 범위에 있는 맛집을 검색하고 후기를 찾아봤다. 그때 처음으로 회사가 서울 한복판에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어느덧 점심식사 메뉴를 정하는 것이 직장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되어버렸다. 그때부터 휴대전화 지도앱에는 맛집을 의미하는 별 표시가 점점 늘어났고 친한 동료들 사이에서 나의 맛집 지도가 유명해졌다. 점심식사 메뉴가 애매할 때면 보물지도를 펼치는 해적 선장처럼 지도 앱을 띠우고는 다들 조그만 화면에 머리를 맞대고 진지하게 목적지를 의논했다. 고심해서 정한 점심메뉴가 맛있으면 그날 얻을 수 있는 만족과 보람은 모두 얻은 것처럼 뿌듯했다.




앞서 소개했던 교촌치킨의 리얼치킨버거를 맛본 후에는 버거맛에 푹 빠져 버렸다. 가게가 사무실에서 조금 멀었지만 종아리가 터질 듯이 걸어갈 가치가 있었는데 재료 준비 시간을 맞추기가 어려웠다. 오후 1시나 되어야 판매가 가능하다는 얘기를 듣고 터덜터덜 가게 밖으로 나온 날이었다. 그 순간에도 점심시간은 줄어들고 있었기 때문에 상심한 마음을 빠르게 가다듬고 다른 가게를 찾아야 했다. 다행히도 주변에는 음식점이 많았다. 그중 어디를 갈지 고민하다가 적당히 붐비는 돈가스 가게를 발견했다. 지도앱에 저장되어 있지 않은 가게라 사전 정보가 전혀 없는 곳이었다. 다행히도 대기 없이 바로 입장할 수 있다고 해서 직원 안내를 받아 자리에 앉았다.


당시에는 일식 돈가스가 한창 유행이었다. 동그랗게 튀겨 반을 잘라 내놓는 안심 카츠나 뽀얀 비계가 도톰하게 들어가 있는 등심 카츠 주가가 방송을 타고 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방문했던 곳은 유행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 경양식 돈가스를 팔고 있었다. 가게에는 유럽 귀족의 응접실에나 달려 있을 것 같은 샹들리에가 걸려 있었고 배경음악으로는 클래식이 흐를 것 같은 분위기였다. 테이블마다 깔려 있는 레이스 도일리 위에는 컵이 켜켜이 쌓여 있었고 자리마다 스푼, 포크, 나이프 세트가 깔려 있었다. 어디를 보나 유럽 감성이 넘쳤는데 새하얀 도자기 그릇에 담긴 김치와 단무지만큼은 누가 봐도 한국적이었다.




우리는 대표 메뉴로 보이는 모둠가스를 각자 하나씩 주문했고 잠시 후 빵과 수프가 서빙되었다. 빵에 발라 먹을 수 있는 블루베리잼과 버터 스프레드도 같이 나왔다. 수프와 빵으로 시작하는 제대로 된 경양식 가게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진한 수프에는 적당한 크기로 잘린 양송이버섯이 들어가 있어 식감이 좋았다. 버터 스프레드는 유명 패밀리 레스토랑에 파는 것보다 훨씬 꾸덕하고 부드러웠다. 기대도 정보도 없이 방문한 곳이 맛집일지 모른다는 기대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수프를 싹싹 긁어서 다 먹었을 때쯤 모둠가스가 담긴 커다란 그릇이 등장했다. 옆 테이블을 훔쳐봐서 그릇이 클 거라 예상은 했지만 막상 눈앞에 놓이니 생각보다 더 커 보였다. 모둠가스라는 이름에 걸맞게 돈가스, 생선가스, 함박스테이크가 골고루 담겨 있었다. 커다란 크기와, 바삭함이 눈으로도 느껴지는 튀김옷을 보니 맛이 너무 궁금해졌다. 나이프와 포크를 들어 돈가스부터 썰어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두툼한 고기와 바삭한 튀김옷, 그리고 입안에 감도는 소스까지 완벽했다. 단 한 입만으로도 이 가게가 맛집이라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사실 나는 생선가스와 함박스테이크를 절대 밖에서 시켜 먹지 않는다. 쉽게 눅눅해지는 생선가스 튀김옷과 먹다 보면 딱딱한 알갱이가 씹히는 함박스테이크는 잘 먹던 입맛도 뚝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곳의 생선가스와 함박스테이크는 달랐다. 생선가스 구석구석 풀 죽은 튀김옷이 없었고 타르타르소스가 묻은 부분마저 바삭했다. 함박스테이크는 말도 안 되게 부드러워서 기존에 갖고 있던 사제 함박스테이크에 대한 편견을 와장창 부숴버렸다. 그날 리얼치킨버거가 수급되지 않았던 것은 운명이었다, 이 돈가스 가게를 만날 운명.




그날 이후로 이 돈가스 가게는 최고의 돈가스 맛집을 넘어 인생 최고의 맛집이 되었다. 회사 점심메이트들은 물론이고 신입직원이 들어오면 맛집 관문으로 반드시 소개해줬다. 게다가 가족이든 친구든 회사 근처에서 만나는 날이면 강력하게 추천했다. 정말 수많은 사람을 데려갔는데 그중 단 한 명도 만족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또 가고 싶다며 일부러 우리 회사 근처로 약속을 잡기까지 했다. 과장을 보탤 것도 없이 회사와 관련된 100가지 중 98개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딱 2개는 마음에 들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이 돈가스 가게를 발견하게 해 준 것이다.


이쯤 되면 사장님과 안면을 트고 지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지만 나는 또 그런 성격은 못 되었다. 일주일에 2~3번은 출근길에 들르던 카페를 몇 달 만에 방문했을 때 카페 사장님이 커피를 건네며 "오랜만에 오셨네요."라고 했을 때도 너무 당황해서 어색하게 웃기만 하는 나다. 생판 다른 곳에서 길 가다 마주쳐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돈가스 가게 사장님 얼굴을 또렷이 기억하지만 정작 가게에서는 마치 사장님이 들으면 안 될 말이라도 하는 것처럼 일행에게 가게 칭찬을 속삭였다.


언제 가도 돈가스 가게는 그대로였다. 위치도, 사장님도, 맛도 변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맛이 변하는 곳들도 더럿 있지만 이곳은 물가에 따라 가격만 올랐을 뿐 음식점의 정수라 할 수 있는 것들은 한결같았다. 정말 맛있는 게 먹고 싶은 날에도, 제대로 든든하게 먹고 싶은 날에도, 특별한 무언가가 먹고 싶은 날에도 무조건 이 집 돈가스를 외쳤던 내가 가게와 멀어지는 일이 생겼다. 다름 아닌 이직을 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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