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슷한 계열의 공공기관 네트워크는 좁은 편이라 인맥 관리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했다. 아무리 상사가 마음에 안 들더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편이 미래에 도움이 될 거라는 얘기를 습관처럼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관계를 쌓는 것이 중요하다고 해도 업무보다 뒷전이면 안 되지 않을까? 그러나 내가 일하는 곳에는 업무보다 상사와 수다를 떨거나 동료와 소문을 만드는 것에 더 열을 올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비생산적인 일에 시간과 에너지를 쏟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나는, "그럴 힘이 있으면 퇴근하고 집까지 뛰어가라."라고 말하곤 했다.
그런 종류의 사람들은 정규직과 공무직의 구분이 없었다. 업무 능력은 떨어지지만 회사에 오래 버티고 있었다는 이유로 과장까지 단 사람은 부서가 다른 데도 굳이 출근 10분 전쯤 우리 사무실로 와서 영양가 없는 농담을 던졌다. 그러다 수다 떠는 것을 좋아하는 부장이 도착하면 사무실 안쪽으로 들어가 속닥거리며 대화인지 소문인지를 나눴다. 과장의 방문은 매일 반복되었고 급기야 퇴근 한 시간 전에도 '면담 신청'이라는 명목으로 또 부장을 찾아오기까지 했다. 자기 팀의 팀장이 싫어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꿋꿋하게 그러는 것을 보면 참 대단한 사람이다.
문고리가 닳도록 들락거리는 과장이 이해는 안 갔지만 나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영향을 미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그 사람은 아예 공무직을 무시했다. 공무직 인사는 받지 않는 무리 중 하나였으니까. 하지만 같은 공무직이 사무실을 어슬렁 거리며 다른 공무직들을 콕콕 찔러보고 출처를 밝히지 않는 소문을 들먹이며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해?"라고 묻는 것은 꽤나 신경에 거슬렸다. 나는 그때마다 생전 처음 듣는 이야기마냥 연기를 하거나 대놓고 무관심을 드러냈는데 그런 내 모습이 도도해 보여 싫었는지 다른 사람들한테 나에 대해 뒷말을 하더라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어느덧 소문을 직장생활의 양분 삼아 나눠먹고 즐겨 먹는 게걸스러움에 질린 사람들끼리 어울리기 시작했고 나도 그중의 하나였다. 우리의 공통점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회사 내 정치질과 소문에 관심이 없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직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자기가 갖고 있는 정보를 골룸이 반지 대하듯 하는 사람들 틈에서 우리는 기꺼이 모든 것을 공유했고 점심도 늘 같이 먹었다. 그러던 어느 날, 휴가 등 여러 일정이 겹쳐 나 혼자 점심을 먹어야 하는 날이었다. 어차피 도시락을 싸 온지라 하던 일을 마무리하고 먹자는 생각에 점심시간을 조금 넘겨서까지 일하고 있었는데 사무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다른 팀의 팀장이 들어왔다.
복도에서 마주치면 인사를 주고받기는 하지만 대화를 해본 적은 없었다. 그날도 역시나 어색하게 인사를 하고 하던 일을 하고 있는데 팀장이 누군가를 찾는듯했다. 아마도 자신의 도시락 메이트가 휴가인 것을 깜박했나 보다. 빈자리를 보고는 한 손에는 도시락을 든 채 '아!'라는 탄식과 함께 머리를 긁적이더니 사무실을 나가려는 찰나, 내 이름을 부르며 말을 걸었다. "점심 안 먹어요?" 나는 깜짝 놀라며 "도시락 싸왔어요."라고 답했다. 순간 혹시 같이 먹자고 할까 봐 긴장했는데 다행히도 팀장은 "아, 그렇구나. 맛있게 먹어요."라는 말을 남기고 사무실을 나갔다.
그 팀장은 혼자 밥 먹으면 큰 일이라도 나는 줄 아는 회사 분위기 속에서도 무덤덤하게 홀로 도시락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었다.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거나 습관적으로 남들과 어울리는 사람 역시 아니었는데 의외로 간혹 안 좋은 소문이 들렸다. 팀장이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이 별로라나? 소문에 대해서 생각해 봤다.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을 비하하는 사람들과 그들이 만들어내는 소문에 대해서.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퍼지는 말들에 대해서. 그리고 시답잖은 소문을 미끼로 던지고는 한 번이라도 걸리길 기다리는 소름 끼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나에 대해서는 얼마만큼의 사실과 얼마만큼의 거짓이 퍼져있을까?
그곳을 다니면서 반면교사로 삼을 어른들은 많이 봤어도 본받고 싶은 어른을 만나는 것은 정말 어려웠다. 하지만 사막에서도 꽃이 피듯 '이렇게 나이 들고 싶다.'라는 생각을 갖게 한 사람이 있었다, 그것도 무려 두 명이나. 한 분은 내가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갑작스러운 인사개편으로 우리 팀 팀장으로 오게 된 분이었다. 그분은 말 그대로 현대판 선비였다. 아는 것이 많고 알고 싶어 하는 지적 욕구도 뛰어났으며 회사 내 정치적 흐름에 편승하지 않고 올곧게 자신의 길을 가는 사람이었다. 모두가 관장의 눈치를 보며 속 없는 말을 뱉을 때도 홀로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그분의 빈틈없이 옹골찬 의견을 들을 때마다 나도 저런 상사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너무 올곧아서똑하고 부러지지는 않을 정도로 유연했다. 윗사람들에게는 뚝심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아랫사람들에게는 부드럽게 대하되 선을 넘지는 않았다. 팀장님을 포함해 다른 직원들과 함께 출장을 가던 날이었다. 일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휴게소 얘기가 나왔고 당시 유행하던 소떡소떡으로 이야기가 흘렀다. 나는 그때까지 소떡소떡을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었는데 그 말을 듣고는 팀장님이 갑자기 휴게소에 들르자고 했다. 시간이 너무 늦어 소떡소떡을 파는 가게는 문이 닫혀 있었지만 나보다 더 아쉬워하며 다른 간식이라도 사주려는 모습에 감동받았다.
계속 같이 일하고 싶은 팀장님이었지만 일한 지 1년이 넘었을 시점에 다른 부서로 옮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일하면서 다른 업무도 욕심이 났던 나는 팀장님께 면담을 신청했고 다른 업무를 해보고 싶어 부서를 옮기고 싶다고 말했다. 속으로는 혹시 팀장님이 오해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오히려 팀장님은 나를 응원해 줬다. 부서 이동 결과가 발표 나던 날, 팀장님은 출근하자마자 내 자리로 와서는 평소 하지도 않던 안부를 묻더니 오늘 좋은 소식이 있을 거라는 언질을 줬다. 그리고 그날 오후, 새로운 부서로 발령받았다는 공지가 떴다.팀장님은 다음 인사개편 때 부장으로 승진하였고 내가 이동한 부서의 부장으로 왔다. 줄타기 바쁜 사람들 사이에서도 능력 있는 자는 살아남는다는 것을 보여준 바람직한 표본이었다.
두 번째로 만난 닮고 싶은 분은 나와 같은 공무직이었다. 내가 입사한 지 5개월 후에 들어온 신입직원으로 직장경력이 30년에 가까운 중년이었다. 공무직으로 대부분 젊은 사람이 들어오기는 했지만 나이 제한이 있는 것은 아니라서 가끔 나이가 많은 분이 입사하기도 했다. 그분과 나는 맡은 업무가 달랐기 때문에 같은 부서에 있어도 같이 대화를 나눌 일이 거의 없었고 점심도 같이 먹지 않았다. 나는 늘 원래 같이 먹던 동료들과 점심을 먹었는데 한 번은 점심을 먹고 돌아오는 길에 그분을 만났다. 혼자 햄버거를 먹었다는 얘기를 듣고는 우리 무리 중 한 명이 "혼자 드시기 싫은 날에는 저희랑 같이 드세요."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다음 날부터 점심식사 메이트가 한 명 더 늘었다.
우리 부모님과 동갑이라는 나이 때문에 처음에는 대하기가 어려웠지만 함께 식사를 하는 시간이 늘어갈수록 점점 편해졌다. 그분과의 관계가 편해질수 있었던 이유는 순전히 그분의 순수한 심성 덕분이다. 함께 일한 3년 동안 단 한 번도 우리에게 권위를 내세우거나 훈계를 하려 들지 않았고 어떤 주제든 우리의 눈높이에 맞춰 대화를 나눴다. '꼰대'와 '라떼는 말이야'가 판을 치던 세상에서 순수하게 우리를 동료로 대해준 유일한 분이었다. 사이가 가까워지면서 서로 장난을 치기도 했지만 회사 생활뿐만 아니라 삶에 대해서도 많은 조언을 구했다. 회사를 다니며 이런 분을 만난 것은 진정한 복이었고 그분을 보며 나도 이렇게 순수하게 나이 들고 싶었다.
점심식사 메이트가 총 8명이라면 그날의 메뉴에 따라 소그룹으로 쪼개졌다. 초밥, 곰탕, 뼈해장국, 쌀국수 등 다양한 메뉴가 매번 다르게 후보로 올라왔는데 그중에서 가장 인기가 없는 메뉴가 있었다. 바로 햄버거. 햄버거가 메뉴 후보에 오를 때 무조건 가는 사람은 나와 그분, 딱 두 명뿐이었다. 우리는 인원이 모이면 모이는 대로 안 모이면 우리 둘이서라도 회사 근처 햄버거 가게를 찾아다녔다. 맥도널드, KFC, 버거킹, 쉑쉑 등 프랜차이즈는 물론이고 동네에만 있는 유명 버거 가게까지 섭렵했다. 서로의 확고한 취향을 알게 된 이후 우리는 팀 내 공식적인 버거 메이트가 되었다.
교촌치킨에서 '리얼치킨버거'를 선보였을 때는 점심식사 메이트들을 우르르 끌고 가서 대낮에 치킨가게를 찾기도 했다. 치킨 버거에 대한 큰 감흥이 없던 나였지만 리얼치킨버거는 달랐다. 일단 크기가 여느 치킨버거를 압도했고 부드럽고 간이 잘 밴 닭고기 패티와 그 맛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조화를 이루는 소스까지 완벽했다. 심지어 가격도 아주 착했는데 단점이 있다면 리얼치킨버거의 판매 시간이 주로 점심시간 이후라는 것이었다. 운이 좋으면 시간을 딱 맞춰서 먹을 수 있었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아쉽게도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하지만 우리의 버거 원정은 끝나지 않았다. 점심식사 비용으로 쓰기에는 아까운, 무려 2만 원에 달하는 버거 세트도 먹으러 갔으며 아보카도가 들어간 버거에 도전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부서를 옮긴 후에는 버거 메이트와의 회동이 전보다 훨씬 줄었지만 그래도 정기적으로 함께 식사를 했다. 뒤에서는 서로를 헐뜯으면서 앞에서는 미소 짓는 사람들 속에서 버거 메이트와의 식사는 힐링이었다. 사람들 때문에 마음이 지쳤을 때 혹은 고민이 있을 때 그분과 대화를 나누고 싶어 같이 버거를 먹으러 가자고 꼬드기기도 했다. 나를 비롯해 모두가 버거 메이트의 순수한 심성에 대한 감탄을 표현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지만 오히려 그분이 부끄러워했다. 가식적인 회사 분위기를 견딜 수 있었던 이유는 몇 안 되는, 순수하고 올곧은 사람들 덕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