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준을 세운다는 것

영화 '내가 널 사랑할 수 없는 10가지 이유'

by 사과실

네 번째 이야기.내가 널 사랑할 수 없는 10가지 이유

미국의 하이틴 영화에서 볼 수 있는 학교 생활은 확실히 내가 겪은 학창 시절과는 다르다. 교실을 이동하면서 수업을 듣지 않았고, 사복을 입지 않았으며, 파티 문화도 없었다. 게다가 전형적으로 등장하는 여왕벌(Queen bee) 또는 킹카, 퀸카는 나이를 들어 다시 보니 유치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물론 이 영화에도 잘 나가는 남학생과 넘보지 못할 여학생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그들을 우상시하지는 않는다. 여왕벌과 어울리다가 순진한 학생이 자신 본연의 모습을 잃는 얘기도 아니고 학교에서 잘 나가는 남자애의 사랑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내용도 아니라서 감사했다. 실제 미국의 학교 실정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영화에 등장하는 말대로 이 영화는 '평범한', 그래서 자극적이지는 않은 10대 이야기다.


영화에는 딸들의 데이트를 단호하게 금지하는 아빠가 등장한다. 딸이 미혼모라도 될까 봐 항상 주의를 주곤 하는데 딸의 입장에서는 과민반응처럼 보일 수밖에. 내가 고등학생 때도, 그리고 대학생 때까지 부모님의 걱정을 들어야 했다. 나도 그때는 비앙카와 똑같이 반응했다. '그런 일 없을 거야. 엄마가 상상하는 그런 거 아니야.' 지금 생각해보니 사실 모든 일은 겨우 한 끝 차이다. 내가 그때 거절하지 않았다면, 따라갔다면, 조금 더 무모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알 수 없다. 지금은 부모님의 걱정을 이해할 수는 있지만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면 똑같은 말로 부모님께 '괜한 걱정'이라고 열을 낼 거다. 보호자가 걱정하는 이유는 단순히 뉴스를 통해 접하는 얘기 때문만은 아닐 거다. 아이의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모르는 게 생기면서 걱정되고 불안해지는 걸 거다. 아이가 만나는 사람, 가는 곳, 하는 것을 보호자가 다 아는 시기는 자연스럽게 끝이 난다. 그때가 되면 보호자는 고민할 것이다, 지금이 놔줘야 할 때인가?


캣과 비앙카는 각각 다른 방식으로 그 시점을 맞이한다. 캣은 자신이 경험한 것으로부터 부정적인 태도를 갖게 되고 마음의 문을 닫는다. 반면에 비앙카는 경험조차 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막연한 선망과 호기심이 그 자리를 채운다. 아빠에 대한 태도도 다르다. 비앙카는 아빠를 설득하려고 하지만 캣은 일단 일을 저지르고 본다. 하지만 캣은 미처 깨닫지 못했다. 자신도 아빠처럼 비앙카를 보호하고 있었단 것을. 아빠도 캣도 자신이 겪은 것을 바탕으로 보호라는 명목 하에 비앙카에게 찾아온 기회를 차단한다. 경고와 차단은 엄연히 다르다. 비앙카는 해보고 싶었던 것을 하나씩 하면서 자신의 취향을 알아간다. 화려해서 멋있어 보였던 것이 자신에게 맞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직접 깨닫는다. 그렇기에 조이와 캐머런 사이에서의 갈등을 끝낼 수도 있지 않았을까?


영화를 자매의 성장 이야기로 볼 수도 있지만 로맨틱 코미디 장르답게 로맨틱한 관계와 장면도 빼놓지 않는다. 특히, 히스 레저의 장면이 마음을 흔들었다. 처음 히스 레저의 목소리가 영화에서 흘러나왔을 때 깜짝 놀랐다. 내가 기억하는 히스 레저는 영화 '다크 나이트'의 조커라는 것을 미리 말해둬야겠다. 히스 레저가 출연한 다른 영화도 봤지만 조커라는 캐릭터만큼 뚜렷하지는 않았다. 그런 내 머릿속에 '패트릭'역의 히스 레저가 들어온 것이다. 패트릭이 보조개를 띠며 웃을 때마다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보조개는 분명 귀여운 특징인데 박력 있게 느껴지다니.

당연히 명장면도 패트릭이 차지했다. 운동장에서 연습하고 있는 캣에게 바치는 프랭크 시나트라의 'Can't take my eyes off of you'. 누군가는 유치하다고 할 수 있고 너무 드라마스럽다고 할 수도 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아닌데 그래도 그 장면을 볼 때 내 볼에 보조개가 핀 걸 보면 마음이 생각과 다른가보다.


내가 널 사랑할3.jpg 영화는 셰익스피어의 '말괄량이 길들이기'의 영향을 받았다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면서 소문이라는 것에 더 예민해졌다. 심리학적으로 남들의 시선을 신경 쓰는 때는 청소년기라지만 남 말을 많이 하는 시기는 성년이 된 이후가 아닌가 싶다. 예전에는 '아니 땐 굴뚝에서 연기 나랴'하고 생각했지만 다른 집 굴뚝에서 난 연기를 언뜻 보고 우리 집 굴뚝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문은 굴뚝 연기처럼 빠르게 퍼지고 어느샌가 소문이 나를 규정해버리기까지 한다. 패트릭과 캣은 소문이 규정한 자신을 일일이 해명하지 않는다. 남들이 하는 말 따위 신경 쓰지 않는 대범함과 다른 사람의 생각도 귀담아듣는 세심함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듯 조절하는 것은 참 힘든 일이다.


기준을 정하는 것은 어렵다. 흐름에 편승해야 할 것 같고 뒤쳐지면 안 될 것 같아 고민한다. 특히 연애에 있어서는 더욱. 이 나이쯤 남들은 이렇게 하던데, 이 정도까지는 다 하는 것 같은데 내가 너무 늦는 것은 아닌지 비교해가며. 처음 연애에 대해 알게 됐을 때 나만의 기준을 세우기란 쉽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하는 방식이 기준인 것 같아 그대로 따라야 할 것만 같다. 영화 속 캣이 교실에서 자신이 쓴 소네트를 읽는 장면을 보면 캣의 뒤로 현수막이 하나 걸려있다. 현수막에는 'What is popular is not always right; what is right is not always popular.'라고 쓰여있다. 많은 사람들이 한다고 해서 옳은 것도 아니고, 옳은 것을 많은 사람들이 하는 것도 아니다. 기준은 다수가 정하는 것이 아니다. 다수에게 영향을 받더라도 내가 정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