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포 선라이즈'
처음 KTX를 탔을 때가 기억난다. 엄마와 서울역에서 부산으로 출발하는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커다란 전광판에 적힌 행선지, 출발 시간, 기차 번호, 플랫폼 번호를 보며 공항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기차를 타려고 내려갔을 때는 플랫폼에서 열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과 열차가 들어오는 모습이 지하철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그때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여러 번 기차를 탔다. 여행, 출장, 면접같이 다양한 이유로.
때마다 기차에서 겪는 에피소드는 늘어갔다. 출장을 갔다 오던 날은 선임과 나란히 앉아 그분의 상경 얘기를 들었다. 그분이 부산에서 올라왔다는 것을 처음 알았는데 마침 타고 있던 기차도 부산에서 올라온 것이었다. 노을 지는 한강 다리를 건너면서 그분이 말했다. '꼭 성공해서 돌아갈 거라고 다짐했는데.'
한 번은 밤기차를 타서인지 객실의 불빛이 어두웠다. 지친 하루로부터 잠깐이라도 쉬어보고자 대부분 잠을 청했다. 그런데 누군가의 코 고는 소리가 객실을 울렸다. 쌔근쌔근 정도로 끝나나 했지만 점점 우렁차 졌다. 사람들은 놀라서 소리가 어디서 나는지 알아내기 위해 두리번거렸다. 나는 이어폰을 껴서 소리를 차단해보려고 했지만 우렁찬 소리는 이어폰을 뚫고 귀에 꽂혔다. 결국 그 사람의 일행이 흔들어 깨우더니 코 고는 소리가 얼마나 큰 지 아냐며 주의를 줬다.
기차를 탈 때마다 꼭 보게 되는 일인데 바로 자리를 잘못 앉는 것이다. 열차 객실 번호가 헷갈리기 쉬워 탈 때마다 번호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수원 가는 열차를 탔을 때의 일인데 내 자리에 다른 사람이 앉아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죄송하지만, 제 자리 같은데요.'라고 말했다. 그 사람은 자신 있게 표를 보여주며 '12호차 5D 맞는데요.'라고 답했다. 나는 객실 문 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13호차인데.' 그 사람은 당연히 당황했고 헐레벌떡 일어나더니 다급하게 짐을 챙겼다. '죄송합니다'라는 말은 사과였지만 미안한 마음보다 민망한 마음이 더 큰 것 같았다.
기차에서 겪을 법한 일은 많이 겪어봤지만 영화처럼 낯선 누군가를 만나서 '이 사람과 잘 맞는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대화를 해본 적도, 그 사람과 낯선 도시에서 내린 적도 없다. 상상으로 그 상황에 가 볼 수밖에. 바로 지금의 기분에 이끌려 지금 이 순간을 같이 보내고 싶어 내린다면 그 사람과 함께 있는 그 순간이 나를 지배할 것이다. 내 과거를 의식하지 않고 미래도 걱정하지 않고 현실에 충실하다 보면 가식을 떨 필요가 없어지고 자연스럽게 솔직해질 수 있다. 그렇다 보니 영화 속 연인의 대화 주제는 다양하다. 가족사, 죽음, 출산, 나를 화나게 하는 것, 환생, 남녀문제. 초면에 나누기 어려운 주제와 민감할 수 있는 주제를 넘나들며 나눈 대화는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 된다. 이 사람이 나를 어떻게 판단할까 두려워하지 않으며 나눈 대화가 언제였던가? 바라는 게 많은 자리일수록 말수를 줄이고 나의 일부를 숨겼다. 솔직하게 얘기하는 영화 속 연인을 보며 부러웠다.
영화 속 연인이 기차에서 처음 만나기 시작한 이후로 두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 장면은 거의 없다. 모든 장면이 두 사람의 손짓, 눈빛, 대화로 이루어진다. 처음에는 서로 눈빛을 마주하는 것도 쑥스러워하더니 나중에는 자연스럽게 그 사람의 팔을 당겨 자신의 허리를 감싸고 섬세한 손짓으로 얼굴을 쓸어내린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 적였던 장면은 식당에서 친구에게 전화하는 장면이다. 물론 친구에게 진짜 전화를 건 것은 아니다. 그 친구가 실존 인물인지조차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친구에게 가상의 전화를 걸어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과 감정에 대해 털어놓는다. 당연히 전화를 받는 사람은 앞에 앉은 연인이다. 낯선 곳에서 즉흥적으로 시간을 보내게 되면 서로에게 집중할 수 있어 좋지만 그것이 단점이 되기도 한다. 바로 객관성을 잃을 수 있다는 것. 그 사람, 그 상황, 속마음을 다른 사람(믿을만한 사람)에게 얘기하며 다시 되짚어 볼 수 없다. 그 장면은 단점을 메꾸기 위한 인위적 상황이다. 동시에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직접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귀여운 꾀를 냈다고 볼 수도 있다.
사실 나는 이런 영화를 볼 때마다 나의 고질적인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후회한다. 나는 충동적인 일을 하지 않는 편이다. 그렇다고 융통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숙박도 미리 예약하지 않고 간다거나 기차를 타다가 뜻밖의 장소에서 내리는 일을 하지는 않는다. 안전상의 문제를 들먹이며 어느 정도 계획된 여행을 즐기는 편이다. 친구들에게는 스스로를 '미리미리충'이라고 희화화하기도 한다. 낯선 환경뿐만 아니라 낯선 사람도 두렵다. 혼자 내일로 여행을 떠났을 때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5일 내내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게스트하우스 중에는 투숙객들을 위한 파티를 여는 곳도 있지만 의도적으로 그런 곳을 피했다. 여행을 계획했을 때만 해도 나의 계획과 성향에 불만이 전혀 없었는데 여행을 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나 왜 이렇게 답답하지?'
사람은 규정된 범위 내에서 즉흥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완전히 즉흥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정해진 반경 안이라는 것이다. 그 글을 읽었을 때 내심 안심했다. 나에게도 즉흥적으로 변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을 거라고. 세상이 안정되고 활동이 자유로워지면 한 번 더 혼자 여행을 떠날 것이다. 얼마나 많이 변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노력할 것이다. 두려움이 내 로맨스를, 추억을 방해하지 못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