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그날의 분위기'
'우연한 만남이 어려운 이유'편에서도 말했지만 나는 즉흥적인 걸 좋아하지 않고 여행지에 가서 모르는 사람과 대화하는 것을 즐기지도 않는다. 처음 보는 사람에 대한 경계가 있는데(누구나 다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낯선 사람이 내게 구체적인 정보를 묻는 게 불편하다. 예를 들어, 낯선 곳에서 누군가 나에게 '어디서 오셨어요?' '무슨 일을 하세요?' '여기 처음 와보세요?' 같은 질문으로 말을 걸면 몸이 반사적으로 뒤로 주춤한다. 그런 모습이 상대방을 불쾌하게 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만약 이런 나에게 영화에서와 같은 상황이 생겼다면 아래와 같이 대응했을 것이다.
1. 재현이 수정에게 바나나우유를 줬을 때 - 바나나우유를 아예 돌려줬을 것이다. 여기 두면 엎지를 것 같다며.
2. 재현이 수정에게 문제의 대사를 했을 때 - 승무원에게 신고한다.
영화는 로맨틱 코미디의 공식을 지킨다. 기차 옆자리에 앉는다는 우연한 만남, 강진철이라는 농구선수를 찾아 나서야 하는 장애물, 그 사람을 만나기 위해 달리는 마지막 장면. 덕분에 이야기의 전개는 흥미롭게 흘러간다. 영화 속에는 무리한 설정과 대사가 등장한다. 특히, 재현의 대사, '웬만하면 그쪽이랑 자려고요' 영화 리뷰 중 '유연석이니까 넘어가는 대사지 다른 사람이 하면 철컹철컹이다'라는 식의 글이 많았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현실에서는 문제가 되는 대사라는 것을 잊지 말자.
재현이라는 캐릭터는 비현실적으로 완벽하다. 외모도 멋있고 일적으로도 열정이 넘치는 사람이다. 심지어 쓰레기를 던져 넣으면 알아서 쓰레기통을 찾아가듯 완벽하게 쏙 들어가기까지 한다. 그 사람의 손에 닿으면 모든 것이 다 잘 되는 것 같고 멋은 그 사람에게 찰싹 붙어 다닌다. 센스와 운 모두 완벽한 사람이다. 재현이라는 캐릭터가 비현실적이고 자신감과 자만심의 경계를 아슬하게 지킬 때, 수정이라는 캐릭터는 좀 더 현실적인 캐릭터라고 볼 수 있는데 '뭐지?' 싶기도 하다. 미끼를 던지면 안 무는 듯하면서 은근히 물고, 단호한 듯 하지만 여지를 주는 말을 한다. 영화의 후반부 유연석의 대사에서도 찾을 수 있다.
'대답 안 할 것 같으면서 다 한다'
수정과 재현은 관계에 대해서 정반대의 입장을 취한다. 수정은 한 남자와 10년을 연애한 상태고, 재현은 하룻밤의 감정을 추구한다. 친구들과 원나잇에 대해 얘기하다 두 가지 위험만 없다면 해볼 만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임신과 범죄.
하지만 내가 원나잇을 하지 못하는 것은 그 두 가지 때문은 아니다. 내가 개방적인 여자가 아니어서도 아니고, 그런 여자 아니라며 내숭을 떨려는 것도 아니다. 영화 속 대사처럼 ' 그 한 번에 인생이 흔들릴'까 봐. 나는 나라는 사람을 잘 알아서 이 사람과 하룻밤을 같이 보내도 된다고 생각할 정도면 아마 하룻밤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랄 것 같다. 그러나 만약 그 기대가 나만의 것이라면 실망을 감당할 수 없을 거다.
재현과 수정은 산속 절에 들렀다가 갑자기 비가 와서 산을 내려가던 중 잠시 오두막 아래서 비를 피한다. 하루 종일 굽 높은 구두를 신고 다녔던 수정은 다리가 불편해 보인다. 재현은 그런 수정을 눈치채고 잠시 앉아보라고 한 뒤 발목을 펴주고 무릎을 따듯하게 해 준다. 수정을 신경 쓰느라 재현은 오른쪽 어깨가 젖는 것도 모른다. 그의 따스함과 헌신적인 모습에 수정의 마음은 따듯해졌을 것이다. 그래서 그와의 하룻밤에 대한 생각을 바꿨을 것이고. 하지만 수정이 좀 더 냉철한 사람이었다면, 혹은 객관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었다면 생각을 바꾸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생각을 바꾼 이유가 원나잇을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와 함께 있고 싶어서라는 걸 알았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