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내 남자친구는 왕자님'
회사에서 불합리한 일을 당하거나 내 노력에 비해 월급이 적다고 느낄 때면 두 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하나는, '빨리 이직해야지'
구직사이트를 들어가서 내키는 대로 스크랩을 해놓다 보면 기분이 좀 나아진다. 이것은 직장 스트레스를 푸는 하나의 방법이 되어버렸다.
둘은, '어디서 30억이 뚝 떨어지면 좋겠다'
30억이라는 숫자는 나름 계산해서 정한 합리적 금액이다. 수도권에 집 한 채 사고, 1년 동안 해외여행을 갔다가 돌아와서 대학원에 진학할 정도의 돈.
첫 번째 생각은 비교적 현실적이지만 요즘같이 취업이 어려운 시기에는 만만치 않다. 두 번째 생각은... 말해서 뭐하나 당연히 꿈이지. 하지만 30억이 내 손에 있다는 생각을 할 때면 잠깐이지만 기분이 좋다. 이런 생각을 끝으로 한숨을 쉬면 주위 사람들이 이런 얘기를 하기도 한다.
"남자 잘 만나서 일 관둬. 그게 최고야."
그럼 나는 답한다.
"지금도 없는 남자를 언제 어디서 잘 만나요."
잠시 신데렐라 스토리를 분석해보자면, 이야기 속 여자들은 직업적으로 성공하지 않는다. 직업이 없는 경우도 있는데 이야기 속에서 여자의 직업 유무는 별로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 '내 남자친구는 왕자님'은 다르다. 페이지는 자신의 꿈을 위해 열심히 노력해 직업적으로 성공하길 원한다. 어떤 직업을 갖고 있는지보다는 어떻게 생겼느냐가 더 중요했던 전형적인 신데렐라 스토리와는 다르다.
반면에, 에드워드는 미래를 위해 살기보다는 현재를 즐기면서 산다. 자신의 노력으로 미래가 바뀔 수 있는 페이지와는 다르게 이미 정해진 미래를 따라야 하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애착이 크지 않은 것일까? 이랬던 에드워드는 페이지를 만나면서 그녀와 함께하는 시간 동안 자신의 노력으로 성취라는 것을 하게 된다. 파트타임으로 일하면서 돈을 벌고, 왕자라서 얻게 된 승리가 아니라 진짜 실력으로 경주에서 이기고, 왕자라는 타이틀 없이도 사랑을 얻는다.
에드워드는 성장하고 자신만의 길을 구축했지만 페이지는 반대로 자신의 꿈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한다. 영화 속에서 페이지는 처음 등장하는 장면부터 끝까지 배우자와 인생을 공유하는 것과 자신만의 삶을 사는 것에 대해 고민한다. 그리고 가정을 꾸리는 것이 자신의 계획에 제동을 걸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것이 결혼 적령기라는 나이가 된 사람이라면 한 번쯤 고민해봤을 주제라고 생각한다.
나 또한 요즘 들어 두 가지 갈래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가정을 꾸리는 것과 나만의 삶을 사는 것 중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까. 다른 사람과 인생을 공유하는 순간 삶의 우선순위가 바뀌면서 선택의 기준도 달라질 텐데 사실 나는 아직 그런 변화를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됐다. 이건 왕자님을 만나고 복권에 당첨된다고 해결되지는 않을 거다. '왕자님을 만나면 나는 공주로서의 삶만 살아야 하는 걸까?' 또는 '복권에 당첨되면 남편과 함께 의논해야겠지?'와 같은 질문으로 바뀔 뿐이니까.
영화 속에서 에드워드의 다양한 요소 중 마음에 들었던 것은 셰익스피어의 작품 속 인물이 할 법한 정중한 말씨와 태도다. 직접 셰익스피어의 대사를 인용하기도 하기도 하니까. 나는 오글거릴 정도의 매너가 좋아 보일 때도 있는데 상대를 존중하는 느낌이 마음에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에서 에드워드는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교내 펍(pub)에서의 일과가 끝나고 페이지와 에드워드는 뒷정리를 하고 있다. 뒷정리를 할 때면 펍에서 일하는 사람들끼리 번갈아가며 노래를 고르는데 그날은 페이지 차례다. 페이지는 주크박스에 동전을 넣고 흘러나오는 노래에 맞춰 맨발로 가볍게 춤을 춘다. 손에는 행주와 스프레이를 들고서. 에드워드는 그 모습을 바라본다. 내가 이 장면을 좋아하는 이유는 바쁘게 사는 페이지의 일상 속에서 작은 행복이 느껴지기 때문이고 에드워드가 페이지의 매력을 진심으로 느끼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내가 두 가지 갈래에서 고민하는 이유는 내 인생에 이렇다 할 게 없어서다. 이성을 잃고 푹 빠질 정도의 사랑도, 모든 시간과 노력을 들여 이루고 싶은 꿈도 없어서. 사랑도 꿈도 다 그럭저럭이라서 고민만 많아진다. 그게 뭐가 됐든 놓치고 싶지 않은 무언가가 내 앞에 나타나길 바란다. 어쩌면 그것이 신데렐라의 숨겨진 이야기일 수도 있다. 자정까지인 줄 알면서도 그 사람과 더 오래 같이 있고 싶었던 마음, 그 사람을 찾기 위해 왕국의 모든 여자들의 발에 구두를 신겨보는 노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