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My best friend's wedding'
나에게도 고등학교 때부터 알고 지낸 이성친구가 있다. 알고 지낸 지 10년이 넘었지만 10년 내내 끈끈한 관계를 유지한 것은 아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는 그 친구가 다른 지역으로 대학교를 진학하게 되면서 방학 때나 잠깐 보는 정도였다. 그러다 졸업 후 그 친구가 돌아오면서 자주 보게 되었다. 일상적인 얘기를 나눌 때도 있지만 서로의 고민을 들어주기도 한다. 나는 주로 이성문제를, 그 친구는 주로 사회생활에서 겪는 어려움을 털어놓는다. 그 친구보다 내가 직장을 2~3년 정도 더 빨리 다니기 시작해서 그 친구의 첫 출근을 앞두고 몇 가지 팁을 알려주기도 했다.
내가 그 친구의 존재를 다른 사람들에게, 특히 직장 동료들에게 얘기할 때면 종종 관계를 의심받는다. 둘 다 서로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는 것이 맞는지를 물으며 예리한 눈초리로 나를 꿰뚫어 보려 한다. 한 번은 극단적인 질문을 받은 적도 있다. 그 친구와 단둘이 호텔방에 있어도 아무 일 없을 없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는가?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사이라고 대답했다.
만나자마자 약혼자의 여사친을 끌어안고 반가운 마음에 탄성을 지르는 여자, 만난 지 8분 만에 여사친에게 메이드 오브 오너(신부 들러리 대표)를 부탁하는 여자, 바로 킴이다. 처음에는 킴이 무슨 생각으로 줄리안에게 저런 부탁을 하는지 의아했다. 기선제압을 하려는 것일까? 진심으로 줄리안을 옆에 두고 싶은 것일까? 아니면 원래 도가 지나칠 정도로 발랄하고 낙천적인 사람일까? 하지만 답은 전혀 달랐다. 킴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마이클을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한 것이다.
킴의 주변 사람들은 줄리안을 두고 '신부가 평생 질투할 사람'이라며 떠들어댄다. 줄리안은 아예 작정하고 마이클과 자신만 아는 이야기를 하며 킴을 대놓고 따돌린다. 킴이 둘의 세월을 실감할 때, 남편의 입에서 평생 이 사람 이름을 들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기분이 어떻겠는가. 짜증 나는 현실이지만 그 남자를 사랑하니 받아들일 수밖에. 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사랑하겠다는 뜻이니까. 그렇다 해도 조지가 줄리안의 약혼자라고 등장했을 때 얼마나 마음이 놓였을지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처음에는 줄리안 자체도 자신의 감정이 진정한 사랑인지, 단순히 지기 싫은 것인지 구분하지 못한다. '내가 오래 알았으니까'라는 마음으로 우선 청구권을 주장하는 것이라고 얘기할 정도다. 그러다 이 감정이 단순한 질투가 아니라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마이클 또한 줄리안이 조지를 약혼자라고 소개할 때 이상한 감정, 질투를 느꼈다고 고백한다. 그 둘이 느꼈다는 질투를 지난 세월의 잔여감이라고 봐야 할까 아니면 깨달음이라고 봐야 할까?
영화를 보다 보면 줄리안은 진정으로 자신이 마이클을 차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결혼식에 온 걸까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갖게 된다. 킴으로부터 마이클을 뺏을 거라고 선전포고 겸 호언장담을 하고 온 것은 맞지만 진심으로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걸까?
줄리안이 사랑한다고 고백하기 전부터 마이클은 이미 알고 있었다, 줄리안의 마음과 그 자신의 마음까지도. 하지만 세월에 붙잡히지 않고 나아가야 할 때라는 것도 깨닫는다. 기존 관계에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줄리안과 마이클 모두 동일하지만 서로 방향이 다르다.
로맨스에 올인할 수 있는 사람 vs. 로맨스를 자기 손안에 두는 사람
줄리안과 킴은 감정표현에 있어서 정반대다. 줄리안이 감정표현을 절제하는 편이라면 킴은 그야말로 감정표현의 홍수다. 둘은 감정표현을 시작으로 로맨스 자체에 있어서도 다른 태도를 보인다.
킴은 사랑에 자신의 모든 것을 올인할 수 있는 사람이다. 학교를 그만두고 마이클과 함께 하기로 결정한 것부터 자신의 커리어를 포함한 인생 전부를 마이클에 맞추겠다는 의지 표현이다. 게다가 줄리안의 이간질로 마이클과 헤어질 위기에 처했을 때는 또 어떠했는가. 마이클에게 매달리며 제발 자신을 떠나지 말아달라고 애걸하기까지 한다. 마이클이 자신의 인생에서 얼마나 큰 부분을 차지하는지 인정하고 그것을 표현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반면, 줄리안은 누군가의 사람이 되는 것에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내 삶의 중심이 흔들리고 주도권이 그 사람에게로 넘어갈까 봐. 그래서 킴처럼 매달리는 짓은 절대 못할 것이다. 줄리안에게 로맨스는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인생의 한 부분일 뿐 인생의 중심에 설 수는 없다. 그래서 다른 모든 것들처럼 자기 마음대로 로맨스를 주무르려고 하고 그럴 수 있다고 믿는다. 줄리안은 자신의 다른 부분도 중요했기에 로맨스를 밀어냈지만 마이클이 바라는 로맨스는 줄리안의 방식이 아니다. 그는 킴의 방식으로 사랑하길 원한 것이다.
킴도 자신의 커리어를 버리고 싶지 않다. 하지만 마이클을 사랑하니까 희생을 선택한 것이다. 마이클도 킴의 아버지가 보낸 이메일을(사실은 줄리안이 썼지만) 용서할 수는 없지만 킴과 결혼하기로 한다. 왜냐하면 킴을 사랑하니까. 줄리안이 간과한 부분이 바로 이 사랑이다. 줄리안은 사랑의 강력한 힘을 무시했다. 사랑에 대해 줄리안은 오만하고 거만했다.
줄리안은 마이클에게 사랑을 고백한 뒤 키스한다. 킴은 둘의 키스를 목격하게 되고, 추격전이 펼쳐진다. 바로 이 추격전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자 영화의 메시지를 압축한 장면이다. 추격적에서 마이클은 킴을 쫓고, 줄리안은 그런 마이클을 쫓는다. 조지는 말한다. "누가 너의 뒤를 쫓지? 아무도 없지? 그게 답이야." 그리고 강력한 한 방을 날린다. "You're not the one!"
줄리안은 자신이 마이클의 '바로 그 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마이클에게 그 한 사람은 킴이거늘, 오히려 줄리안은 킴이 방해꾼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로맨틱 코미디 영화의 법칙 중 3단계가 '달리기'라고는 하지만 추격전으로서의 달리기는 참으로 독특하다.
이성친구사이를 그리는 영화 중 친구끼리 이어지는 것으로 결말을 맺는 경우가 많다. 킴처럼 새롭게 등장한 인물은 그간의 세월 동안 깨닫지 못했던 감정을 깨닫게 해주는 존재로 사용된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다르다. 이 영화는 세월에 집착하지 않은 사랑을 보여준다. '그동안 깨닫지 못했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듯. 세월의 우선 청구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앞서 말했던 남사친을 알고 지낸 10년이라는 세월에 대한 자부심은 없다. 오히려 그 친구가 이성친구이기 때문에 여러 부분에서 조심했다. 그 친구가 만나는 사람이 있을 때는 함부로 연락하지 않고, 오해를 살만한 행동이나 말은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 친구와의 관계를 계속 유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성친구를 이해 못한다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타박할 권리는 없다. 만약 둘 중 한 명이 서운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서운하게 하고 싶지 않다. 이건 지극히 이기적인 생각으로, 이성친구가 나를 서운하게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서운하게 하는 것은 참을 수 없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