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해달라고 말하는 한 소녀

영화 '노팅 힐'

by 사과실

영화나 드라마에 등장하는 배우를 보고 '나도 저런 사람 한 번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압도적인 다리 길이와 훈훈한 얼굴, 게다가 행동은 어찌나 멋있고 부드러운지, 배우의 입에서 나오는 대사 하나하나가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 극 중 인물일 뿐.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 자체에 빠진 건지 그 사람이 맡은 배역에 빠진 건지 구분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화면 속 배우는 나와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만약에, 정말 만약에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서 혹은 길을 걷다가 그 사람과 우연히 마주쳐 인연이 생긴다면 어떨까? 우리가 심심치 않게 하는 상상으로 시작하는 영화가 있다. 수많은 명장면과 패러디를 만들어낸 영화, 바로 노팅힐이다.


노팅힐5.jpg 바르셀로나의 여행 전문 서점


영화는 미국 할리우드의 유명 배우 애나 스콧(줄리아 로버츠)이 영국에 머무는 동안 노팅힐에서 여행 전문 서점을 운영하는 윌리엄 대커(휴 그랜트)를 만나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이다. 둘의 인연은 애나가 윌리엄의 서점을 우연히 방문하면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길 한복판에서 윌리엄이 애나에게 음료를 쏟으면서 다시 만난다. 둘은 그 이후 데이트를 하기도 하지만 애나는 다시 미국으로 떠난다. 그 이후 애나는 불미스러운 사건이 터지자 갑작스럽게 윌리엄의 집을 찾아온다. 그렇게 둘은 다시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된다.


윌리엄은 서점이 운영난을 겪고 있어 커피 한 잔을 사려해도 고심해야 하지만 몰래 책을 훔치려던 손님에게 재치를 곁들여 대처할 정도의 여유는 가지고 있다. 영화를 보는 내내 편안한 마음이 들었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윌리엄이 가지고 있는 여유 때문이었다. 어수룩할 때도 있지만 보채지 않고 느긋하게 세상을 대하는 그의 자세. 그렇기에 애나가 위기에 처했을 때 윌리엄을 찾았던 것이 아닐까?

둘의 데이트 또한 윌리엄스럽다. 첫 데이트임에도 동생 생일파티에 데려가 친구들에게 애나를 소개해준다. 격식도 없고 화려하지도 않다. 게다가 그때까지만 해도 파파라치조차 없었다.


영화 '노팅힐'을 반복적으로 보면서 기억 속에 남는 단어가 있다. 그것을 바탕으로 세 가지 키워드를 만들어 그들의 만남을 살펴보겠다.




첫 번째, HORSE&HOUND

윌리엄은 우연한 만남 이후 애나가 남긴 메시지를 받고 애나를 다시 만나러 호텔로 간다. 둘만의 데이트를 상상하며 꽃다발까지 샀는데, 호텔에 도착해보니 사람들로 붐비는 것이 아닌가! 알고 보니 애나가 출연한 영화에 대한 인터뷰가 진행 중이다. 애나의 예상보다 인터뷰가 길어져 윌리엄이 애나를 만나려면 기자 행세를 하는 방법밖에 없다. 마침 영화 관계자가 윌리엄에게 묻는다. "어느 잡지에서 오셨어요?" 윌리엄은 난감한 듯 주변을 둘러보다 탁자 위에 있는 잡지 하나를 발견하고는 대답한다. "HORSE&HOUND(말과 사냥개) 요."

HORSE&HOUND는 실제로 영국에 존재하는 잡지이다. 1884년부터 발간된,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승마 주간지이다. 잡지사의 인터넷 사이트를 들어가 보니 영화 관련 글을 찾기는 어려웠다. 윌리엄의 대사처럼 '영화 속에서 말을 탄다면' 모르겠지만.

윌리엄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인 기자 회견에서도 다시 한번 잡지를 언급한다. '구독자들도 기뻐할 겁니다'라며 자신의 캐릭터를 잊지 않는데, 그 순간 가장 기뻤던 사람은 본인일 것이다.


두 번째, 마지막 브라우니

윌리엄이 애나와 함께 간 동생의 생일파티에서 가장 인기 있는 메뉴는 브라우니이다. 브라우니 한 조각이 남자 그들은 '가장 불쌍한 사람'에게 마지막 한 조각을 주기로 결정한다. 그들은 한 명씩 돌아가면서 마지막 브라우니를 먹기 위해 자신이 왜 가장 불쌍한 지를 얘기한다. 실직해서, 아직도 자리 잡지 못해서, 아이를 가질 수 없어서, 거품뿐인 관심의 실체를 알기 때문에.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는 약간의 영국식 유머가 가미된 장면이 아닌가 생각했다. 이 장면을 풍자적이라고 생각한 이유는 바로 브라우니가 갖고 있는 의미 때문이다. 브라우니는 힘든 얘기를 터놓고 할 수 있는 핑계다. 즐거운 자리에서 우울한 얘기를 하면 분위기를 망치지 않을까 걱정하여 우울한 속내를 감추는 사람을 위해서 핑계가 되어준 것이다. 그럼으로써 브라우니는 위로라는 보상이 된다.

온택트든 언택트든 자기 자랑을 하는 사람은 많다. 하지만 나의 취약한 부분, 가장 아픈 부분, 힘든 부분을 꺼내서 들려줄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스스럼없이, 오히려 웃으면서 자신의 어두운 부분을 얘기할 수 있는 것을 보면 그들이 진정한 친구임을 알 수 있다.


세 번째, 헨리 제임스

애나는 고전물보다는 공상 과학물 같은 현대물에 주로 출연한다. 애나가 윌리엄의 집에서 잠시 머무는 동안 대사를 맞춰보는데 윌리엄이 애나에게 제인 오스틴이나 헨리 제임스 작품을 바탕으로 한 영화에 출연해볼 것을 권한다. 윌리엄의 개인적인 취향이 들어간 제안이 아닐까 싶다. 이후 윌리엄과 애나는 영화 촬영장에서 재회한다. 바로 헨리 제임스의 작품을 원작으로 한 영화 촬영장에서.

왜 하필 헨리 제임스일까? 작가 헨리 제임스는 미국인이지만 영국으로 건너와 1915년에 영국 시민권을 획득했다. 소설에서도 그의 삶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데 그의 소설은 미국인 주인공이 유럽 혹은 영국으로 와서 겪게 되는 일을 그리고 있다. 참으로 애나의 상황과 닮았다. 영화 속에서 애나가 촬영하던 영화는 헨리 제임스의 'The Siege of London'이라는 소설을 원작으로 한 것이다. 애나는 소설 속 Mrs. Headway의 역할을 맡았다. 그 인물은 미국에서 여러 일을 겪고 런던으로 왔는데 그 부분 또한 애나와 닮았다.

윌리엄은 약속도 없이 무작정 애나를 찾아 영화 촬영장으로 간다. 다행히도 애나가 그를 발견해서 잠시 얘기를 나누는데 윌리엄은 촬영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한다. 그러자 애나가 말한다. "차 마시고 있어요(Have a tea, Have lots of tea)." 개인적으로 이 장면이 가장 명장면이라고 생각한다. 이후 오해를 풀기 위해 애나가 윌리엄의 서점을 방문해 자신을 '사랑해달라고 말하는 한 소녀(Just a girl stands in front of a boy asking him to love her)'라고 표현하는데, 그 대사에 가장 들어맞는 장면이 바로 촬영장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애나의 쑥스러우면서도 기대에 젖은, 수줍은 표정이 인상적이다.




노팅힐1.jpg 노팅힐의 포르토벨로 마켓 가는 길


영화의 제목은 왜 노팅힐일까? 사실 노팅힐의 역사를 살펴보면 로맨스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기도 하다. 노팅힐은 포토벨로 마켓과 카니발로 지금은 영국의 유명 관광지이지만 노팅힐의 역사는 평탄치 않았다. 1833년 영국에서 노예 제도가 사라지면서 값싼 노동력을 위해 영국은 수많은 이민자를 수용하기 시작했다. 영국으로 이주해 온 이민자가 모여 살던 곳 중 하나가 바로 노팅힐이다. 이민자의 노동 시장 점유율이 증가하게 되고 이는 일부 영국인들의 반발을 샀다. 이민자들은 인종을 비롯해 계급 차이에서 오는 설움까지 겪게 된다. 노팅힐은 뿌리 깊은 차별 문제를 품어온 지역이면서 그 문제를 해소한 곳이기도 하다. 영화 '노팅힐'은 윌리엄과 애나의 사랑이야기가 주를 이루지만 영화 곳곳에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가 펼쳐져 있다. 영화를 반복적으로 보다 보면 새로운 이야기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 또한 영화의 또 다른 매력이다.




애나가 윌리엄과 처음으로 밤을 같이 보낸 뒤 말한다. "리타 헤이워드가 말하길, '남자들은 길다와 잠자리에 들어 아침이면 나와 함께 깬다'" 여기서 잠깐, 리타 헤이워드는 20세기 중반에 활동했던 배우로서, 출연했던 유명한 작품 중 '길다'라는 영화가 있다. 리타 헤이워드를 얘기할 때 영화 '쇼생크 탈출'을 빼놓을 수 없다. 영화에서 앤디 듀프레인의 방에 걸린 첫 번째 포스터의 주인공이자, 머리카락을 완벽하게 뒤로 젖히며 요염하게 고개를 들어 죄수자들의 환호성을 불러일으켰던 바로 그 사람이다. 죄수자들의 반응이 당시 뭇 남성들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배우의 진짜 모습과 그 배우가 맡았던 역할 중 우리는 누구와 사랑에 빠지는 것일까? 애나는 과연 자신의 진짜 모습으로 사랑받고 있는 것인지 걱정스러운 것이다. 올리비아 핫세의 유명한 인터뷰가 있다. 올리비아 핫세의 결혼에 관해서 한 기자가 '왜 이 남자와 결혼을 하기로 했는지' 질문을 던졌다. 올리비아 핫세는 그 순간 기자의 눈을 가리고 자신의 눈이 무슨 색깔인지 물었다. 하지만 기자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자 그녀는 '다들 내 가슴만 볼 때 '초록색'이라고 답한 유일한 남자가 바로 그 사람'이라고 대답했다.


영화의 OST 중 대표적인 사운드트랙은 'She'이다. 영어에서 She는 대명사지만 그 노래를 듣고 있으면 'She'가 마치 고유명사처럼 느껴진다. 특정한 한 사람을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단 하나의 사람이 되고 싶은 것, 그리고 나를 세상에서 고유한 사람이라고 느끼게 해주는 것이 바로 사랑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