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로맨틱 홀리데이(The Holiday)'
가장 좋아하는 계절은 가을이지만, 가장 좋아하는 시즌은 크리스마스이다(season이 계절이라는 뜻도 있으니 아이러니하다). 나뭇가지에 붙은 잎사귀들이 낙엽으로 떨어지기도 전, 은행잎 끝자락만이 겨우 노랗게 물들 때쯤인 10월 초부터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나는 영화를 보기 시작한다. 따뜻한 겉옷을 걸치고 뜨거운 차를 한 잔 타서 호호 불어가며 영화를 재생시키면 화면과 나를 둘러싼 공간은 크리스마스가 된다. 추위가 시작되기 무섭게 크리스마스를 갈망하는 습관은 20살이 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때마다 보는 영화의 레퍼토리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영화 '로맨틱 홀리데이'이다. DVD까지 구입할 정도로 영화에 애정을 느꼈다.
'영화로 사랑하기' 매거진의 첫 번째 편에서 로맨틱 코미디 영화의 법칙에 대해 살짝 적어봤다. 그때 언급했던 것 중 하나가 이번 영화에 나오는 '우연하지만 운명적인 만남', 바로 meet cute이다. 영화 시나리오 작가인 아서 애봇은 아이리스를 처음 만났을 때 meet cute의 예시를 들어준다.
두 사람이 가게에 들어오더니 동시에 잠옷을 집는다.
한 사람은 말한다, '저는 윗도리만 있으면 돼요.'
그리고 다른 사람은 말한다, '저는 바지만 있으면 돼요.'
아서 애봇의 입을 통해 설명된 meet cute는 영화 속 로맨스를 함축하고 있다.
아이리스는 영국에서 웨딩 칼럼을 쓰는 기자로 같은 회사에 다니는 재스퍼와 사내 연애를 했다. 하지만 크리스마스 연휴 바로 직전, 재스퍼가 회사의 다른 직원과 약혼한 사실을 공개적으로 밝히면서 아이리스는 제대로 뒤통수를 맞는다. 아이리스의 동료 말을 빌리면 아이리스가 재스퍼의 빨래까지 해줬다는 소문이 돌 정도라고 하니 아이리스는 완벽하게 '을의 연애'를 하고 있었다. 황당한 재스퍼의 발표에 화를 낼만도 한데 아이리스는 재스퍼에게 제대로 한 마디조차 하지 못한다. 그게 바로 아이리스의 연애 방식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만큼 다 퍼주는 사랑.
그런 아이리스에게 아서 애봇과 마일스가 나타난다. 아이리스는 아서 애봇을 만나면서 알게 모르게 '당당한 여자 되기' 프로젝트의 주인공이 된다. 우연히 알게 된 마일스 또한 아이리스 같은 사랑을 하고 있었다. 좋아하는 만큼 다 퍼주고 어찌 보면 끌려다니는 사랑을 했던 것이다. 둘은 좋아하는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마음을 퍼주지만 공허함을 느낀다. 주기만 할 뿐 받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진심이 마땅한 대우를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서로에게 느끼는 감정은 이전에 만났던 사람들에게서 느꼈던 연애감정과는 다르다. 더욱 편안하고 나를 이해해주는 느낌이다.
한편, 아만다는 미국의 영화 예고편 제작회사를 운영하는, 소위 잘 나가는 삶을 산다. 하지만 이든이 다른 사람과 바람을 핀 것이 도화선이 되어 이별하게 된다. 이별하는 와중에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다고 지적한 이든은 얄밉지만 사실 아만다도 알고 있었다, 자신의 삶이 자신을 더 불안정하게 만든다는 것을. 아만다는 감정 표현에 자유롭지 못하고 완벽주의적인 모습을 보인다. 성공 지향적인 모습은 아만다를 강해 보이게 만들지만 사실 아만다는 감정이 터져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 강해졌던 것이다.
그런 아만다에게 우연히 다가 온 그레엄은 아만다와 달리 '감정과잉'이다. 그레엄은 스스로를 terrible weeper라고 칭하며 조금만 감동 받아도 눈물을 흘린다고 고백한다. 아마 그레엄의 이러한 모습이 15살 이후로 울어본 적 없는 아만다에게 더욱 솔직하고 진실한 느낌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리고 아만다의 감정을 여는 열쇠가 된다. 어쩌면 상황이 상황인지라 아만다가 그레엄에게 마음을 열었을 수도 있다. 일이 우선이었던 삶이었지만 아예 다른 나라로 날아오면서 일에서 벗어나 자신과 상대방에게 온전히 집중할 수 있게 됐으니 말이다. 그래서 아만다와 그레엄도 '우연하지만 운명적인 만남'인 것이다. 하필 그 타이밍에 그 사람을 만났으니까!
그들의 연애를 반복적으로 시청했던 어린 나이에는 내가 아이리스처럼 될 거라 생각했다. 예전의 나는 남들 눈치를 보다 자기주장은 뒤로 미루고 발표하는 것도 두려워할 정도로 소심했으니까. 하지만 정작 그들의 나이와 비슷해지니 오히려 아만다와 비슷한 모습을 발견했다. 완벽주의적인 성향, 정확한 의사전달, 하지만 방어적일 때면 감정을 숨기는 모습. 나도 솔직해지는 연습이 필요하다.
이 영화의 감독인 낸시 마이어스에 대해 얘기하고 싶다. 필모그래피를 보면 여러 영화가 있는데 그중 눈에 들어온 것은 '페어런트 트랩', '왓 위민 원트' 그리고 '인턴'이다. 어렸을 때 '페어런트 트랩'을 몇 번이나 봤는지 모른다.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생 중 린제이 로한의 영화를 안 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 시대의 아이콘이었기에, 지금은 유치하게 느껴지는 영화지만 그때가 그리울 때면 다시 보곤 한다. '왓 위민 원트'는 영화 내용도 유쾌하지만 음악이 마음에 들어 OST를 샀다. 가끔 퇴근 후에 듣곤 한다. '인턴'은 내가 직장인이 되고 나서 봤다. 특별한 우정과 직업적으로 성공한 여성에 대한 시선과 고뇌에 대한 얘기가 인상적였다.
낸시 마이어스의 영화를 볼 때면 로맨스도 로맨스지만 내 삶의 경종을 울릴 때가 있다. 내가 바라는 것은 무엇인지 들여다보게 되고, 내가 잘 살고 있는지 돌아보게 된다. 다행히도 확실한 해피엔딩을 맞는 영화들이라 희망도 잊지 않고 내 손에 쥐여준다.
영화에는 특별한 설정이 등장한다. 바로 '홈 익스체인지'. 정해진 기간 동안 서로 집을 바꾸어 지내는 것이다. 태어나서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곳에서 동네 주민처럼 산다는 것은 상당히 매력적인 상상이다. 요즘 들어 익숙한 곳에서 벗어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나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있는, 내가 전혀 모르는 곳으로 가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도대체 내가 무엇에서 벗어나고 싶은지도 모르겠고 지금까지의 삶이 불만이냐고 묻는다면 확실히 대답할 수도 없다. 하지만 지금의 삶에 지쳐버린 것 같다. 무기력한 현실이, 새로운 곳에서 시작한다면 나에게도 혹시 어떤 형태로든 '우연하지만 운명적인 만남'이 생길 수도 있지 않을까란 상상에 불을 지폈다. 나도 몰랐던 내 문제를 직시하게 해 줄 아서 애봇을 만날 수도 있고, 나를 편안하게 해 줄 마일스를 만날 수도 있고, 내 감정의 문을 열어줄 그레엄을 만날 수도 있다. 이상적인 만남이라 이런 것을 기대한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민망하고 부끄럽지만 몰래 작은 상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