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보다는 낙엽에 어울리는 로맨스

영화 '유브 갓 메일'

by 사과실
뉴욕의 가을은 멋지지 않나요?


뉴욕의 아침, 캐슬린과 조가 노트북을 열어 이메일을 확인한다. 조의 이메일은 뉴욕의 가을을 감탄하며 시작한다. 붉게 물든 가로수 옆으로 가게가 문을 열며 활기찬 하루를 맞는다. 가을의 쌀쌀한 아침 바람이 불어오는 것이 느껴진다. 쌀쌀한 바람이지만 하늘은 푸르러 추위가 차갑기보다는 맑게 느껴진다. 점심이면 햇살이 따듯해질 것이다. 가을의 정취를 잘 담은 영화는 그 어떤 계절보다도 역시나 가을에 어울린다.

나의 계절도 이제 가을이다.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덥고 축축한 여름이 지나고 청명하고 넓은 가을이 왔다. 가을은 봄과는 다른 차분한 설렘이 있다. 올해는 유독 여름이 길게 느껴져서 애타게 가을을 기다렸다. 출근길마다 지하철역에서 나와 회사 건물로 들어가기 전 10분의 시간 동안 최대한 아침의 가을을 만끽하려 노력한다. 날마다 가로수의 색은 짙어지고 하늘은 더 높아진다. 뉴스에서 말하길, 가을에는 실제로 구름이 높이 떠 있어 하늘을 볼 수 있는 시야가 많이 확보된다고 한다. 캐슬린과 조의 뉴욕만큼 내가 살고 있는 도시도 아름다운 가을을 뽐내고 있다. 그래서 가을에는 도시에 대한 애정도 깊어진다.




영화는 시작부터 옛 것과 새 것을 구분하며 새 것의 등장으로 옛 것이 잊히는 것을 아쉬워한다. 영화에서 옛 것을 상징하는 것에는 개인서점, 연필, 타자기, 우편, 손수건 등이 있다. 반면, 옛 것을 위협하는 새 것에는 기계, 대형 프랜차이즈, 노트북, 이메일 등이 있다. 아이러니한 것은 영화에서 새 것으로 등장하는 것도 지금은 옛 것이 되었다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매개로 등장하는 이메일이다. 문자메시지를 지나 톡의 시대가 열리면서 시시때때로 연락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 보니 하고 싶은 말을 간직했다가 쏟아내는 이메일이 설 자리를 잃고 있다. 내 메일함만 봐도 광고나 스팸, 결제 내역을 알리는 것들로만 가득하다. 그나마 다행으로 회사에서는 아직도 이메일의 입지가 굳건하다.


캐슬린과 조는 각각 Shopgirl과 NY152라는 아이디로 이메일을 주고받는다. 서로의 진짜 이름을 포함하여 구체적인 정보는 알리지 않는다. 일상을 공유하지만 상대방이 누군지 모르는 데에는 짜릿함과 편안함이 동시에 존재한다. 오히려 솔직하게 내 얘기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익명의 누군가는 아니지만 한 사람과 오랜 기간 이메일만 주고받은 적이 있다. 중학교 3학년 때 미국으로 유학을 갔던 친구와 나눈 것인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까지 이메일로 연락을 주고받았다. 같은 학교에 다니고 항상 붙어 다니는 친구에게 말하지 못했던 것도 그 친구에게는 말할 수 있었다. 우리는 각각 다른 나라에, 다른 공간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내 삶이 그 친구에게, 그 친구의 삶은 나에게 책 속 이야기와 다르지 않았다. 자세하게 알 수는 있지만 내가 속하지는 않은 세상. 그래서 더 솔직할 수 있었다.


유브갓메일4.jpg 바르셀로나의 역사를 간직한 서점


I'm wondering about my work.


자신의 일이 의미 있고 멋진 것을 알아도 확신이 없을 수 있다. 오랫동안 해온 일이더라도 의심이 들 수 있다. 캐슬린은 조에게 보내는 이메일에서 자신의 일에 회의가 든다고 말한다. 캐슬린의 고민은 나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에게도 해당된다. 지금 내가 맞는 길을 가고 있는 것일까? 단지 도전할 용기가 없어서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닐까?


캐슬린은 말한다, "내가 이 일을 좋아해서 하는 걸까요 아니면 용기 없어서일까요. 세상의 많은 것들이 책에서 본 것을 연상시켜요. 하지만 그 반대여야 하는 거 아닐까요?"


책은 삶을 반영한다고 한다. 삶에서 책의 장면을 발견하는 것, 책에서 삶의 장면을 발견하는 것. 캐슬린은 왜 후자여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전자는 삶이 책과 같다고 끼워 맞추려는 노력이 될 수도 있어서일까? 처음 캐슬린의 대사를 들었을 때는 한 번에 와 닿았다. 그런데 영화를 다시 보고, 대사를 곱씹다 보니 이제 잘 모르겠다. 내가 처음에 이해했다고 한 의미가 맞는지, 처음에 이해했던 것은 무슨 의미였는지.




유브갓메일6.jpg 리버사이드 공원에서 만난 캐슬린과 조


이 영화는 완벽하다. 도시의 아름다운 부분에 대한 묘사, 설레는 배경음악, 배우들의 편안한 분위기까지. 특히, Heroine(여자 주인공이라 할 수 있지만 영웅적인 여자라고 할 수도 있다. 캐슬린은 오만과 편견의 '엘리자베스'를 여성 캐릭터(female character)라 부르지 않고 heroine이라고 불렀다. 나도 캐슬린에게 그 말을 붙이고 싶다)인 캐슬린이 마음에 든다. 캐슬린은 바보 같지 않고 무모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오버스럽지도 않다. 그저 그녀의 삶에 로맨스가 찾아온 것이고 그것을 쓸데없이 부정하려 들지도 않는다. 그래서 캐릭터가 부담스럽지 않고 친근하면서도 닮고 싶어 진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마지막 장면이다. Shopgirl과 NY152가 드디어 만나게 된 순간. 조가 리버사이드 공원에 등장하자마자 나는 활짝 웃었다. 이미 Shopgirl이 누군지 알고 있던 조와 이제야 NY152의 정체를 알게 된 캐슬린의 생각과 감정을 동시에 이해했다.


당신이길 간절히 바랐어요.

불안하고 긴장한, 걱정스러우면서도 기대하는 조의 표정이 모든 것을 설명해줬다. Shopgirl이 캐슬린인 것을 알게 된 이후 했던 행동들의 이유를. 캐슬린이 자기를 받아주기를 원해서, NY152가 자신인 것을 알았을 때 실망하지 않고 받아주길 바랐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는 '그 사람밖에 사랑할 수 없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던 것이다.




작품 속의 작품은 나도 영화를 따라 해 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을 들게 한다. 그래서 들어보고 싶고, 보고 싶고, 읽고 싶어 진다. 이번 가을에는 조니 미첼의 음반을 들어보고, 생전 처음으로 대부를 볼 것이며, 오만과 편견을 다시 한번 읽을 것이다.


캐슬린은 계절과 함께 간다. 서점이 안정적이라고 믿었던 가을이었다. 하지만 서점은 위기를 맞고 겨울이 되자 운영이 어려워졌으며 결국 정리하게 된다. 하지만 '서점 = 캐슬린'이라는 공식은 없다. 봄이 오자 캐슬린은 새로운 꿈을 키운다. 우리의 삶도 계절과 같다. 안정적이다 싶으면 흔들리고, 끝이다 싶었는데 새로운 시작이 기다린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