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과실 Jun 11. 2022

에스프레소로 갈아탈 때가 오다

취향 존중이 보편화되는 세상

여느 때와 다름없는, 회사에서 맞는 점심시간이었다. 기름진 짜장면을 먹었더니 입가심이 필요해서 카페에 들러 커피 한 잔을 테이크 아웃할 생각이었다. 양치를 해도 입가심은 되겠지만 어쩐지 점심을 먹고 나서 바로 양치를 하면 식사의 여운이 없어질 것 같은 마음에 매번 이상한 고집을 부린다. 평소 같았으면 양은 많고 가격은 저렴한 프랜차이즈 카페를 갔겠지만 그날은 달랐다. 같이 점심을 먹은 직장동료가 뜻밖의 제안을 했던 것이다.


"혹시 에스프레소 드셔 보셨어요?"


에스프레소를 마셔 본 적은 없었지만 소문은 익히 들어왔다. 빵이랑 같이 주문했는데 빵 찍어 먹는 소스인 줄 알았다는 이야기부터 장난치냐며 더 달라고 화를 냈다는 이야기까지 다양했다. 그러한 소문이 쌓이고 쌓여 에스프레소에 대한 이미지는 아무나 마시는 커피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누군가 에스프레소를 시키면 먹을 줄은 아냐는 질문과 함께 옅은 비웃음을 날릴 정도로 뭘 좀 아는 사람이나 마시는 것이라는 이미지가 박혀버렸다. 마냥 쓰기만 한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것은 맛도 모르면서 캐비어를 찾는 것과 다르지 않은 허세라고 생각했다.




에스프레소바는 회사 근처에서 장사가 가장 잘 되는 유명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멀지 않았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동료는 자연스럽게 에스프레소 두 잔을 주문했다. 나는 별다른 뜻 없이 메뉴판을 보고 있었는데 가게 주인은 점심시간에는 한 번에 주문해야 된다며 살짝 까칠하게 말했다. 어떤 뜻인지 명확하게 이해하기 전에 주인의 까칠한 말투가 먼저 귀에 꽂혀서 슬며시 메뉴판을 밀어놓았다. 동료는 다시 한번 주문을 넣으며 설탕도 넣어달라는 말을 덧붙였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이탈리안이라고 할만한 알베르토 몬디는 이탈리아에서는 회식으로 에스프레소를 마신다고 했다. 퇴근 후 에스프레소바를 찾아 자리에 앉지도 않고 선 채로 에스프레소 한 잔을 마시는 짧은 회식을 즐긴다는 것이다. 벽에 붙어 있는 한 뼘 조금 넘는 넓이의 판에 팔꿈치를 기대고 서 있으니 알베르토가 말한 에스프레소바가 이런 곳이겠구나 싶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잔에 담긴 에스프레소가 나왔다. 잔만큼 작은 스푼으로 에스프레소를 살살 저었다. 첫 모금은 두려움과 호기심 그리고 설렘으로 마셨다. 설탕을 넣어서였을까? 익히 들어온 악명과는 다르게 전혀 쓰지 않았다. 오히려 진한 맛이 느껴져서 제대로 된 커피를 마시는 기분이었다. 아메리카노처럼 묽지 않고 라떼만큼 달지 않은 정직한 커피였다.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동안 여러 사람들이 가게로 들어와 아메리카노를 사 갔다. 가게 운영을 위해서는 대중성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일까? 아메리카노는 테이크아웃만 된다는 것으로 에스프레소'바'의 정체성을 유지했다.

 



남자친구와의 데이트를 앞두고 지도 앱에 '에스프레소'를 검색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에스프레소에 대한 첫 경험이 강렬했기에 여운을 이어가고 싶었다. 마침 남자친구가 경복궁 옆에 있는 에스프레소바를 알고 있어서 서촌으로 향했다. 10명도 채 들어가지 못할 작은 에스프레소바는 고궁 옆 한국적인 동네에서 이탈리아를 담고 있었다. 이탈리아의 미술관에서나 볼듯한 명화에 에스프레소잔을 합성하여 만든 그림과 카드가 가게 곳곳에 붙어있었다. 이번에는 편안하게 메뉴판을 살펴볼 수 있었다. 남자친구는 설탕 넣은 기본 에스프레소를 골랐고 나는 크림이 올라간 에스프레소 콘 파나를 골랐다. 거기에 카야잼을 바른 포르투갈식 크루아상도 곁들였다.



바 한쪽에 자리를 잡고 서서 잠시 기다리니 주문한 메뉴가 나왔다. 커피 잔이 내 앞에 놓이기 전에 직원이 물었다. '두 분 다 오른손 잡이세요?' 왼손잡이로 태어나서 불편함은 느껴봤어도 배려를 받은 적은 별로 없었다. 특히나 카페에서 왼손잡이에 대한 배려를 받을 줄은 더욱 몰랐다. 내가 왼손잡이라고 밝히자 손잡이를 왼쪽 방향으로 돌려준 뒤 스푼의 위치도 바꿔주었다. 뜻밖의 배려에 감동받아 에스프레소바에 대한 인상까지 좋아졌다. 직원의 설명대로 크림과 커피를 섞지 않고 크림부터 따로 먹었다. 에스프레소 위에 올라간 크림은 진하면서 부드러웠다. 크림을 다 먹은 후에는 바닥에 깔린 설탕을 스푼으로 휘휘 저어 섞어 마셨다. 쌉쌀하게 담백한 에스프레소의 맛이 느꼈다. 포르투갈식 크루아상은 일반적인 크루아상보다 꾸덕해서 진한 에스프레소와 잘 어울렸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군은 이탈리아에 주둔하는 동안 에스프레소를 처음 접했다고 한다. 에스프레소의 쓴 맛에 놀라 물을 타서 마셨다고 하는데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아메리카노라는 말이 있다. 당시 에스프레소에는 설탕도 들어있지 않았던 것일까? 혹 이탈리아인의 자존심을 지키려는 의도는 아니었을지 생각해본다. 에스프레소 한 잔에 이탈리아인의 정체성을 담았다고 한다면 과언일 수도 있지만 문화에 대한 이탈리안의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일화다.


하지만 대중화는 자부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닌가 보다. '아아'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아메리카노는 이미 널리 퍼져 있다. 그렇지만 나는 에스프레소의 대중화에 한 표를 던지고 싶다. 민트 초코도 처음부터 민초단으로 대우받지는 않지 않았는가. 이제는 취향 존중이 보편화되는 세상이 되었다. 대중이 대중화를 선도하던 시대에서 소수도 대중화를 만들 수 있는 시대가 오기를 바라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점심인데 피자를 먹어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