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프레소로 갈아탈 때가 오다

취향 존중이 보편화되는 세상

by 사과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회사에서 맞는 점심시간이었다. 기름진 짜장면을 먹었더니 입가심이 필요해서 카페에 들러 커피 한 잔을 테이크 아웃할 생각이었다. 양치를 해도 입가심은 되겠지만 어쩐지 점심을 먹고 나서 바로 양치를 하면 식사의 여운이 없어질 것 같은 마음에 매번 이상한 고집을 부린다. 평소 같았으면 양은 많고 가격은 저렴한 프랜차이즈 카페를 갔겠지만 그날은 달랐다. 같이 점심을 먹은 직장동료가 뜻밖의 제안을 했던 것이다.


"혹시 에스프레소 드셔 보셨어요?"


에스프레소를 마셔 본 적은 없었지만 소문은 익히 들어왔다. 빵이랑 같이 주문했는데 빵 찍어 먹는 소스인 줄 알았다는 이야기부터 장난치냐며 더 달라고 화를 냈다는 이야기까지 다양했다. 그러한 소문이 쌓이고 쌓여 에스프레소에 대한 이미지는 아무나 마시는 커피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누군가 에스프레소를 시키면 먹을 줄은 아냐는 질문과 함께 옅은 비웃음을 날릴 정도로 뭘 좀 아는 사람이나 마시는 것이라는 이미지가 박혀버렸다. 마냥 쓰기만 한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것은 맛도 모르면서 캐비어를 찾는 것과 다르지 않은 허세라고 생각했다.




에스프레소바는 회사 근처에서 장사가 가장 잘 되는 유명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멀지 않았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동료는 자연스럽게 에스프레소 두 잔을 주문했다. 나는 별다른 뜻 없이 메뉴판을 보고 있었는데 가게 주인은 점심시간에는 한 번에 주문해야 된다며 살짝 까칠하게 말했다. 어떤 뜻인지 명확하게 이해하기 전에 주인의 까칠한 말투가 먼저 귀에 꽂혀서 슬며시 메뉴판을 밀어놓았다. 동료는 다시 한번 주문을 넣으며 설탕도 넣어달라는 말을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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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이탈리안이라고 할만한 알베르토 몬디는 이탈리아에서는 회식으로 에스프레소를 마신다고 했다. 퇴근 후 에스프레소바를 찾아 자리에 앉지도 않고 선 채로 에스프레소 한 잔을 마시는 짧은 회식을 즐긴다는 것이다. 벽에 붙어 있는 한 뼘 조금 넘는 넓이의 판에 팔꿈치를 기대고 서 있으니 알베르토가 말한 에스프레소바가 이런 곳이겠구나 싶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잔에 담긴 에스프레소가 나왔다. 잔만큼 작은 스푼으로 에스프레소를 살살 저었다. 첫 모금은 두려움과 호기심 그리고 설렘으로 마셨다. 설탕을 넣어서였을까? 익히 들어온 악명과는 다르게 전혀 쓰지 않았다. 오히려 진한 맛이 느껴져서 제대로 된 커피를 마시는 기분이었다. 아메리카노처럼 묽지 않고 라떼만큼 달지 않은 정직한 커피였다.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동안 여러 사람들이 가게로 들어와 아메리카노를 사 갔다. 가게 운영을 위해서는 대중성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일까? 아메리카노는 테이크아웃만 된다는 것으로 에스프레소'바'의 정체성을 유지했다.




남자친구와의 데이트를 앞두고 지도 앱에 '에스프레소'를 검색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에스프레소에 대한 첫 경험이 강렬했기에 여운을 이어가고 싶었다. 마침 남자친구가 경복궁 옆에 있는 에스프레소바를 알고 있어서 서촌으로 향했다. 10명도 채 들어가지 못할 작은 에스프레소바는 고궁 옆 한국적인 동네에서 이탈리아를 담고 있었다. 이탈리아의 미술관에서나 볼듯한 명화에 에스프레소잔을 합성하여 만든 그림과 카드가 가게 곳곳에 붙어있었다. 이번에는 편안하게 메뉴판을 살펴볼 수 있었다. 남자친구는 설탕 넣은 기본 에스프레소를 골랐고 나는 크림이 올라간 에스프레소 콘 파나를 골랐다. 거기에 카야잼을 바른 포르투갈식 크루아상도 곁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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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 한쪽에 자리를 잡고 서서 잠시 기다리니 주문한 메뉴가 나왔다. 커피 잔이 내 앞에 놓이기 전에 직원이 물었다. '두 분 다 오른손 잡이세요?' 왼손잡이로 태어나서 불편함은 느껴봤어도 배려를 받은 적은 별로 없었다. 특히나 카페에서 왼손잡이에 대한 배려를 받을 줄은 더욱 몰랐다. 내가 왼손잡이라고 밝히자 손잡이를 왼쪽 방향으로 돌려준 뒤 스푼의 위치도 바꿔주었다. 뜻밖의 배려에 감동받아 에스프레소바에 대한 인상까지 좋아졌다. 직원의 설명대로 크림과 커피를 섞지 않고 크림부터 따로 먹었다. 에스프레소 위에 올라간 크림은 진하면서 부드러웠다. 크림을 다 먹은 후에는 바닥에 깔린 설탕을 스푼으로 휘휘 저어 섞어 마셨다. 쌉쌀하게 담백한 에스프레소의 맛이 느꼈다. 포르투갈식 크루아상은 일반적인 크루아상보다 꾸덕해서 진한 에스프레소와 잘 어울렸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군은 이탈리아에 주둔하는 동안 에스프레소를 처음 접했다고 한다. 에스프레소의 쓴 맛에 놀라 물을 타서 마셨다고 하는데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아메리카노라는 말이 있다. 당시 에스프레소에는 설탕도 들어있지 않았던 것일까? 혹 이탈리아인의 자존심을 지키려는 의도는 아니었을지 생각해본다. 에스프레소 한 잔에 이탈리아인의 정체성을 담았다고 한다면 과언일 수도 있지만 문화에 대한 이탈리안의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일화다.


하지만 대중화는 자부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닌가 보다. '아아'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아메리카노는 이미 널리 퍼져 있다. 그렇지만 나는 에스프레소의 대중화에 한 표를 던지고 싶다. 민트 초코도 처음부터 민초단으로 대우받지는 않지 않았는가. 이제는 취향 존중이 보편화되는 세상이 되었다. 대중이 대중화를 선도하던 시대에서 소수도 대중화를 만들 수 있는 시대가 오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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