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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실 Jun 16. 2022

비 오는 출근길의 이상과 현실

아스팔트에 내리는 비처럼

오랜 가뭄으로 인해 땅이 갈라져서 흙을 다 퍼낸다는 뉴스를 봤다. 올해는 전년도 강수량의 3분의 1도 채우지 못한다고 하니 정말 심각한 가뭄이다. 가뭄이 지속되면 농사가 힘들어질 것이고 당연히 수확물에도 영향을 미친다. 적은 수확량은 적은 공급으로 이어져 높은 수요를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고 물가는 어쩔 수 없이 오를 것이다. 월급 빼고 다 오르는 상황에서 높은 물가를 어떻게 감당해야할까 벌써부터 걱정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 같아라는 이제 진짜 옛말이 되어버렸다. 생각이 여기에까지 미치니 맑은 하늘보다 구름이 잔뜩 낀 흐린 날을 기다린다.


애꿎은 맑은 하늘만 탓하던 어느 날 드디어 비소식이 들렸다. 며칠에 걸쳐 비는 산발적으로 내렸고 오후에 갑작스러운 스콜처럼 쏟아지기도 했다. 이제 우리나라의 기후가 점점 동남아화되가는 구나. 천둥소리가 가까이 들릴 때면 사무실에 앉아 키보드를 치다가도 멈칫하기는 했지만 시원하게 내리는 빗줄기를 보며 안도했다. 그래, 어서 땅을 좀 적셔주기를. 사무실에서 창밖으로 보는 빗줄기는 TV 뉴스로 보는 빗줄기와 다르지 않다. 화면과 소리가 좀더 실제같을 뿐 나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아무리 무서운 빗줄기라 할지라도 어딘가 필요한 곳에서는 단비같을 거라는 희망으로 평온하게 바라볼 수 있다.




하지만 출근길에 만나는 비는 다르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막기 위해 한 손으로 우산을 드는 수고를 하며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신발이 젖어가는 것을 느낄 때면 '조금만 늦게 오지'라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가랑비도 아니고 폭우가 몰아칠 때면 붐비는 대중교통을 타는 것도 곤혹스럽다. 옴싹달싹 못하는 열차는 우산에서 떨어지는 빗물로 바닥이 흥건하다. 자칫 미끄러지지 않게 주의해야 한다. 젖은 우산은 사람들의 옷과 가방에 어쩔 수 없이 빗물을 묻히며 비를 받아내느라 고생했던 티를 낸다. 그렇다보니 비 오는 출근길에는 당연히 아끼는 옷을 입을 엄두도 못내고 자연스레 어두운 색깔의 옷을 고른다.


이번주는 한 주 내내 전국적으로 드문드문 비소식이 있어 늘상 우산을 가지고 다닌다. 다음주나 되어야 맑은 하늘을 볼 수 있다고 하니 한동안 가방이 무겁겠다. 어제 역시 가방에 우산을 넣고 출근했다. 집을 나섰을 때는 하늘에 구름이 꼈을뿐 비가 오지는 않았다. 그래서 우산을 고이 가방에 넣어둔 채 버스를 탔다. 그날따라 버스가 조금 늦게 와서 지하철로 갈아타는 시간이 애매했다. 버스에서 내려 신호가 바뀌자마자 지하철역으로 달려가면 딱 맞춰 탈 수 있는 정도였다.



예상한 대로 아슬아슬한 시간에 버스가 나를 내려줬다. 나는 횡단보도 바로 앞에 서서 신호등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손 하나로 가릴 수 있는 정도였는데 곧 떨어지는 횟수가 잦아졌다. 물 웅덩이에 빗방울이 부딪히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백팩을 메고 있었기에 우산을 꺼내려면 가방을 앞으로 메고 꺼내야 했다. 어차피 신호만 바뀌면 역까지 뛰어갈 텐데 조금만 참자는 생각으로 꺼내는 것을 단념했다. 그때 내 앞쪽에 서있던 한 여자가 내 옆으로 와서 자신의 우산을 조금 높이 들더니 내 머리 위를 가려줬다.


나는 너무 놀라서 고개를 돌려 그 여자를 보고 목례를 하며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아침이라 목이 잠긴 데다 마스크까지 쓰고 있어서 내 말이 제대로 전달됐는지는 알 수 없었다. 뜻밖의 배려에 잠시 머릿속이 하얘졌다. 곧이어 신호등이 바뀌었고 나는 다시 한 번 목례를 한 뒤 지하철역으로 뛰어갔다. 뛰어가는 길에서야 머리가 제대로 작동했다. 혹시 내가 같이 쓰는 게 싫어서 뛰어간다고 생각하면 어쩌지? 지하철 도착 시간이 촉박해서 뛰어가야 한다고, 씌워주셔서 감사하다고 설명했어야 했나? 뒤늦은 생각들이 하늘을 메운 먹구름처럼 머릿속에 가득찼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출근길에 갑작스럽게 비가 올 때면 지하철역 출구에서 오도가도 못하고 초조해하는 사람들을 종종 본다. 그럴 때마다 나는 자랑스럽게 우산을 꺼내 미리 챙긴 자의 여유를 부리며 우산을 쓰고 출구를 나섰다. 그 순간 '어디까지 가냐고 물어볼까?'라는 생각이 스치기는 하지만 한 번도 행동으로 옮긴 적은 없었다. 급하게 전화를 거는 사람들을 보며 나름대로 해법을 찾아서 잘 가겠지라며 스스로에게 위안을 줬다.


나는 그동안 왜 어제의 우산녀처럼 용기를 내지 못했을까? 작은 행동이라도 큰 용기가 필요하다. 혹시 내가 오지랖을 부리는 것은 아닌지, 괜히 거절당해서 민망한 상황에 놓이는 것은 아닌지, 같이 쓰고 가면 어떤 대화를 해야 하는 건지 등 온갖 물음을 무릅쓰고 행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물음을 뒤로하고 내게 우산을 씌워준 어제의 우산녀가 존경스러웠다.


 



도시에 내리는 비는 농촌에 내리는 비만큼 가뭄에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아스팔트는 빗물을 흡수하는 능력이 없어 그대로 증발해버리기 때문이다. 땅이 빗물을 흡수해야 가뭄 해결에 도움이 되기에 아스팔트로 떨어진 빗물도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이 필요하다. 열을 잔뜩 받아 건조한 아스팔트를 식힐 수는 있어도 그것은 잠깐일뿐 다시 빗물이 하늘로 올라가버리면 아스팔트는 다시 열을 받고 건조해진다.


머리 위로 우산을 씌워줬던 그 사람의 따듯한 마음이 내 건조한 마음에 떨어졌다. 아스팔트에 내린 빗물처럼 하루가 지난 지금 그 사람의 마음도 내 마음에서 날아가고 있을까? 해가 조금씩 내리쬐기 시작하는 창밖을 보며 나에게는 그 마음을 담고 있을 용기가 있는지 생각한다. 나도 남들에게 빗방울 같은 사람이 되리라는 바람직하고 희망적인 결론을 내리고 싶지만 그건 너무 자의식 과잉이다. 요즘 들어 내가 얼마나 자기중심적인 사람인지를 깨닫고 있어서 함부로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어제 내 마음에 따듯함이 내렸음을 잊지는 않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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