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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실 Jun 23. 2022

영화관에서만 느낄 수 있는 영화의 매력

나의 가장 오래된 취미

어린 시절 영화관에 대한 기억은 단편적이다. 지금처럼 모바일앱으로 쉽게 영화 티켓을 예매할 수 없었던 시절이었기에 매표소 앞으로 줄을 서 있던 사람들의 모습, 수표 같이 생긴 영화 티켓, 고소하면서도 짭조름한 향으로 가득한 영화관 로비, 어두운 상영관에서 숨죽이며 영화의 시작을 기다리던 나. 이 모든 것이 사진처럼 뚝뚝 끊어져 머릿속에 떠오른다. 처음 영화관을 찾았던 날을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분명 엄마와 함께였을 것이다. 어린 시절 영화관에 대한 모든 기억은 엄마로 시작해서 엄마와 함께 마무리했기 때문이다. 영화보다는 간식에 더 관심이 많아 츄러스를 사달라고 조르고는 영화가 시작하기도 전에 다 먹어버린 적도 있었다. 시나몬의 진한 향과 달달한 설탕의 맛이 지금도 혀 끝에 느껴진다. 조조 영화를 보던 날에는 주말인데도 늦잠을 잘 수 없음이 원망스러웠지만 영화 관람 후에는 대체로 외식을 했기 때문에 밖에서 즐기는 점심식사가 반가웠다.


이런 나의 첫 번째 취미가 영화 포스터 수집이라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흐름이었다. 영화관에서 관람한 영화의 포스터만 한 장씩 가져오는 것으로 시작해서 진열대에 꽂혀있는 모든 포스터를 가져오는 것으로 확대되었다. 집으로 가져온 포스터 낱장은 A4 파일로 들어갔다. 어느새 두꺼운 파일이 차곡차곡 쌓여 30권을 넘었다. 처음에는 어차피 쓰레기가 된다며 이해하지 못하셨던 엄마께서도 이제는 유물이라고 하시며 끈기 있게 지켜온 취미생활을 이해해주신다. 코로나 시대 이후로는 영화 포스터를 발행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지고 영화관보다는 스트리밍 서비스로 영화를 관람하는 것에 익숙해졌지만 나는 여전히 영화관만의 매력이 좋다.




흔히 블록버스터 영화는 극장에서 봐줘야 한다고 말한다. 큰 스크린과 공간을 가득 채우는 음향 때문일 테지만 사실 블록버스터 영화뿐만 아니라 어떤 영화든 영화관에서 볼 때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 온전히 영화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에서는 더 깊이 몰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전혀 모르는 사람들과 영화라는 공동 주제로 무언의 감정 대화를 나눌 수도 있다. 영화 '인크레더블 2'를 보던 날이었다. 유머러스한 장면이 나올 때마다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영화를 같이 보던 친구들뿐만 아니라 상영관 안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소리 내어 웃었다. 나도 마음 놓고 사람들과 함께 웃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똑같은 영화를 집에서 봤을 때는 그때처럼 웃기지 않았다. 한 번 봤던 영화라서 일까? 아니면 다른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없어서였을까?



웃긴 장면뿐만 아니라 슬픈 장면에서도 무언의 공감을 나눌 수 있다. 조용히 흐르는 눈물을 닦고 있는데 옆이나 뒤에서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나면 '저 사람도 이 장면에서 슬프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동질감을 느낀다. 영화관이라는 공간에서 우리는 모두 같은 곳을 바라보며 같은 것에 집중하고 있다. 감독이 연출하고 작가가 쓴 대사를 배우가 표정과 입으로 표현하여 장면이라는 것을 만들면 그다음은 우리의 몫이다. 우리는 관람객이라는 이름으로 각자 장면을 해석해서 웃음이나 눈물로 감정을 뱉어낸다. 그러한 과정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곳이 바로 영화관이다.




물론 영화관에서 사람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매번 아름다울 수는 없다. 나 역시 눈살을 찌푸리는 경험을 수차례 겪었다. 주말 낮에 아들과 영화를 보러 온 아빠가 내 앞줄에 앉아 영화 중반부부터 코를 골기 시작했다. 아들 옆에 앉은 사람이 아들에게 귓속말로 얘기하자 아들은 창피했는지 아빠를 거칠게 깨웠다. 이 정도는 애교였다. 평일 동안 회사 일로 지친 아빠가 아들과 시간을 보내고자 영화관을 찾았는데 한낮의 졸음이 몰려오는 것은 같은 직장인으로서 나름 이해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그 아빠는 바로 잠에서 깨 다시 잠들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성의를 보였다. 하지만 자신의 무례한 행동을 깨닫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집에서 본다고 착각하나 싶을 정도로 영화를 보는 내내 떠드는 사람부터 앞 좌석을 툭툭 치거나 당당하게 휴대전화를 켜고 볼 일은 보는 사람까지 다양하다. 참지 못하고 누군가 주의를 줘도 아랑곳하지 않고 민폐를 반복하는 모습을 보면 저런 사람은 답이 없지 싶어 단념한다.



나의 경우 화를 삭이고 단념을 택하지만 종종 화를 폭발시키는 사람들도 있다. 영화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기 시작하자 민폐 행동을 했던 사람이 주의를 준 사람에게 가서 따지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당신이 먼저 잘못하지 않았냐고 말하면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눈치를 주냐며 되받아친다. 대부분의 싸움은 몇 마디 짜증 섞인 소리를 주고받는 것에서 끝나는데 딱 한 번 육탄전으로 번질 위기를 목격했다. 퇴근하자마자 후다닥 영화관으로 달려간 날이었다. 이미 상영관은 사람들로 가득했고 나도 내 자리를 찾아 앉았다. 그런데 직감적으로 느낌이 이상했다. 뭔가 싸한 기분이 들어 오감각을 바짝 곤두세우자 청각이 뒷자리 대화를 잡아냈다. 바로 뒷자리에 앉은 사람과 그 옆 사람이 말다툼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새 다툼의 원인은 뒤로 하고 서로의 나이와 태도를 문제 삼고 있었다. 조금 실랑이를 벌이다 그치겠지 싶었으나 점점 고성이 오가더니 급기야 시계를 푸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너무 무서워서 뒤도 돌아보지 못하고 상체를 최대한 앞으로 숙여 괜한 몸싸움에 불똥이라도 맞지 않으려고 발악했다. 다행히도 영화가 시작하기 직전 직원이 와서 뒷자리 사람들을 데리고 나갔다. 그제야 나는 몸을 제대로 일으킬 수 있었다.

 



영화관은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인 만큼 다양한 일들이 벌어진다. 다음 날 동시간대 티켓을 들고 내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에게 날짜가 다르다고 얘기해준 적도 있으며 영화가 시작한 후 영상은 나오는데 소리는 나오지 않은 채로 3분 정도 관람한 적도 있었다. 유쾌한 일과 불쾌한 일이 모두 일어나는 영화관에서 나는 매번 생각한다.

'영화관에서 겪는 경험도 영화의 일부다.'

이렇게 생각하면 유쾌한 일에는 기분이 더 좋아지고 불쾌한 일도 어느 정도 넘어갈 수 있다. 영화 관람은 돈을 지불하고 제공받는 서비스이기에 불쾌한 일을 두고 손해를 본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나의 정신건강을 위해서 영화 관람을 서비스가 아닌 경험으로 간주하기로 했다. 경험은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나는 영화관에서만 느낄 수 있는 좋은 감정을 충분히 만끽하려고 한다. 어두운 상영관에서 희미하게 반짝이는 번호를 따라 자리를 찾을 때부터 설레기 시작한다. 10분 동안 광고를 보며 친구와 귓속말을 속삭이는 시간도 소중하다. 곧이어 상영관의 불이 꺼지고 비상대피도가 등장하면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어디로 나갈지를 마음속으로 정한다. 다시 한번 화면이 어두워지면서 본격적으로 영화가 시작함을 알린다. 그 순간이 되면 영화에 대한 집중도와 설렘은 최대치로 올라간다. 나는 친구에게 눈짓으로 또는 속삭임으로 영화 관람에 들뜬 마음을 전달한다.

"영화 재밌게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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