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빈 윌리엄스의 영화 <굿 윌 헌팅 Good Will Hunting>
안녕하세요. 사하입니다. 여섯 번째 편지예요.
연휴는 어떻게 보내셨나요. 간만의 여유를 누린 분도 보통의 휴일을 보낸 분도 고단한 하루를 지나온 분도 계시겠죠. 후자로 갈수록 소원을 이루어주는 보름달의 효능이 배가 되기를 바래봅니다. 소원을 안 비셨다면 오늘이라도 좀 안 되겠냐고 부탁해보세요. 달님은 아무래도 커다랗고 동글동글하니까 무던히 받아줄 거예요.
우스갯소리지만 그래도 보름달에 소원을 비는 풍경은 꽤 로맨틱해요. 이뤄지지 않을 가능성을 충분히 예감하면서도 소망을 소곤닥거리는 마음이 귀엽기도 하고요. 달에게만 고백할 수 있는 마음이 조금은 애련하기도 하고요.
SNS에 블로그에, 말을 할 공간은 넘쳐나지만 사실 우리 모두 말할 수 없는 말들을 품고서 살잖아요. 스스로도 이해 못할 말을, 하물며 타인에게는 결코 닿지 못할 말들을 꿈에라도 들킬까 묻어두면서요. 달에게라도 말할 수 있다면 다행이지 싶으면서도 가끔은 쓸쓸해요. ‘말할 수 없는’이 유일한 수식어가 되는 감정이 우리에게 있다면 대개는 비애와 닮아있을 테니까요. 슬픔보다 참담한, 설움보다 절박한 무엇을 담아내지 못하는 말(言)이란 무슨 소용일까. 그런 생각도 들죠. 서로를 가늠할 순 있어도 완전히 맞닿을 순 없는 말은 어쩌면 투명한 벽과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말의 무력無力을 먼저 말해두고서 말하긴 우습지만, 오늘은 제게 ‘말의 힘’을 가르쳐준 사람을 소개하려 합니다. 미국의 배우 ‘로빈 윌리엄스’인데요. 뼈의 성장이 막바지로 향하던 중학생 시절 DVD를 빌려가며 그의 영화를 섭렵하곤 했어요. 시작은 <죽은 시인의 사회> '존 키팅' 선생님이었죠. ‘현재를 즐겨라’, ‘자신만의 걸음으로 걸어라’ 같은 그의 말들은 한창 자라는 저의 뼈에도 속속들이 스미곤 했습니다. <패치 아담스>에선 의사, <굿모닝 베트남>에선 라디오 DJ로 직업은 훅훅 바뀌어도 그의 역할은 서로 닮아있었어요. 머릿속이 반짝 켜지는 말들로 사람들을 웃기고 울리고, ‘삶’에 가까운 방향으로 끌어당기는 사람이 바로 그였습니다.
영화 <굿 윌 헌팅>에서도 비슷한데요. 심리학 교수 ‘숀’ 역할의 그는 어린 시절 학대 경험이 있는 청년 ‘윌’의 상담사로 등장하죠. 버림받는 일이 두려워 농담과 시비만 던져대는 윌과의 상담은 쉽지 않지만, 엎치락뒤치락 밀고 당겨가며 두 사람은 서서히 가까워져요. 그리고 영화의 말미에서 숀은 윌의 과거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네 잘못이 아니야. (It’s not your fault.)”
윌은 가볍게 받아치지만 숀은 호락호락하지 않아요. 윌이 진심으로 이해할 때까지 여러 번 반복하죠. 네 잘못이 아니야. 너의 모든 상처들은 네 잘못이 아니야. 그렇게요. 상처 받기 무서워 모두를 상처 줄 기세로 굳어있던 윌은 결국 마음껏 무너져 내립니다. 말 한마디가 가질 수 있는 힘을, 저는 이 장면에서 배웠어요. 그리고 생각했죠. 나도 누군가를 위로하는 말을 하고 싶다고요. 누군가를 변화시키는 글을 쓰고 싶다고요.
몇 달 뒤 로빈 윌리엄스의 부고를 접했을 때, 영화의 여운은 이미 희박했습니다.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이라는 말에도 슬프기보단 어리둥절했어요. 그랬구나, 하고 잊었던 것도 같습니다. 그의 죽음을 생각하게 된 건 말로 사람을 변화시키겠다는 저의 호기로운 꿈이 우스워진 후였지요. 어떤 고통 앞에선 말이란 껍데기에 불과함을 처절히 깨달을 때마다 저는 상상했어요. 로빈처럼 많은 이에게 위로가 되고서 스스로 떠나간 사람들을요. 무례임을 알면서도 상상을 멈출 수 없었어요. 상상 속에서 저는 그들 앞에 서요. 어떤 말을 해야 할까요. 어떤 말이 필요할까요. 어떤 말이, 살릴까요. 몇 번을 시도해도 답을 찾진 못합니다.
제게 말의 힘과 말의 무력을 동시에 가르쳐준 그를 생각하면서요, 최근 영화를 다시 보았습니다. 그런데 숀이 윌을 위로하는 장면에서 다른 게 보이더군요. 네 잘못이 아니야. 그 말이 아닌, 머뭇대는 손과 떨리는 입가, 흔들리면서도 윌을 똑바로 보려는 숀의 눈빛이 보였습니다. 그의 ‘말’이 아닌, 말을 하는 ‘그’가 보였습니다.
숀은 윌을 바꾸려거나 울리려고 말하지 않았어요. 그건 그냥 아파서 한 말이었습니다. 안타깝고 아픈데, 도무지 해줄 게 없어서 하는 말이요. 말하는 사람이 먼저 아픈 말, 말의 무력함을 아는 사람이 하는 말, 투명한 벽을 맨손으로 세차게 두들기면서 나도 거기로 가고 싶다고 외치는 말이요. 불가능을 알면서도 두드리는, 실패가 예정된 말이요.
위로의 본질은 어쩌면 그런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불가능과 실패를 예견하면서 무력하게, 하지만 최대한의 힘으로 두드리는 행위일지도 모르겠어요. 말의 힘과 말의 무력은 실은 그렇게 맞닿아 있어서, 숀의 위로가 윌에게 가닿는 기적 같은 일이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지도요.
보름달에는 어떤 소원을 비셨나요. 불가능을 두드리는 마음으로 빈 소원들이 꼭 이뤄지길 바라요. 불가능을 두드리는 마음으로 우리가 더 많은 말들을 나눌 수 있길 바라요. 그러다가 언젠가 한 번쯤은 서로에게 가닿을 수 있기를, 불가능을 두드리는 마음으로 바래봅니다.
2021.09.26. 사하 보냄.
추신. 말에 대해 지지부진한 얘기를 늘어놓은 건 사실 고맙다고 말하고 싶어서 인데요. 말이 이다지도 무력한 세상에서, 자기 안에 고인 말만 풀어내기도 벅찬 사람의 삶에서 제 말을 읽고 반응을 보여주는 당신에게요. 그거 보통 쉬운 일이 아니라고, 우리 지금 되게 멋진 일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그런 말을 하고 싶었어요. 말하고 보니 역시 말로는 부족하지만 그래도 다시 말하자면,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