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사 너스바움 <혐오와 수치심>
안녕하세요. 사하입니다. 일곱 번째 편지예요.
오랜만이죠. 며칠간 아무것도 쓰지 못했네요. ‘간헐적 절필 기간’이었습니다. 이 기간에 저는 글을 쓰지 못하는데요, 뚜렷한 계기는 없습니다. 누구의 변심인지 모르게 멀어진 연인처럼 글과의 사이가 서먹해지는 거예요. 그럼 아무것도 쓰지 않고 가만히 기다려요. 쓰고 싶은 마음이 올 때까지요. 간단히 말하자면, 농땡이 부리고 왔어요.
기왕의 농땡이, 베짱이처럼 즐기면 좋을 텐데요. 쓰지 못하는 저는 실연당한 사람 마냥 우울이 깊어진단 말이죠. 파도에 쓸려나가는 모래처럼 몰아치는 우울에 잠자코 닳아가다 보면 한 가지 생각에 부닥쳐요. ‘나는 왜 이 모양 이 꼴일까?’ 거기까지 다다르면 대개는 탄수화물 부족을 탓하며 맛있는 걸 먹고 잠이나 자죠. 하지만 때로는 발목을 심하게 삐끗한 것처럼 우울의 수렁에 꼼짝없이 잡혀버리기도 합니다. 그럴 땐 ‘나는 왜 나인가’ 하는 꽤 철학적인 질문까지 나아가곤 하죠.
당신도 있으실까요. 약해빠진 스스로에 질겁해서 미움으로 모든 마음을 소비해본 적이요. 나의 구석구석을 자근자근 짓이길 듯 미워하거나 나를 닮은 누군가를 열렬히 증오한 적이요. 사실 이건 답이 정해진 물음입니다. 그런 마음과 씨름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우리는 모두 ‘완전함’을 원하니까요. 고뇌도 갈등도 무기력도 무능력도 불안도 외로움도 없는 존재가 되길 갈망하니까요. 그래야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는 세상의 전언(傳言)에 따라 분투하듯 살아가니까 말이죠.
오늘 소개드릴 책 『혐오와 수치심』의 저자 마사 너스바움은 ‘완전함’을 향한 우리의 갈망을 집요할 만큼 치밀하게 들여다봅니다. 얼마나 치밀하냐면 책의 주 용도가 무기인지 베개인지 헷갈릴 정도예요. 700쪽이 넘는 '유사 돌베개'인 이 책을 제가 훌륭히 요약할 가능성은 요원하지만 최대한 애써볼 테니 부디 조금만 더 읽어주세요.
저자가 말하는 ‘혐오와 수치심’을 가늠할 수 있는 예시를 먼저 들어볼게요. 한 번 상상해보세요.
한 푼의 돈도 벌지 못해 생활을 의존해야 한다면, 살찐 몸과 주름 진 얼굴이 거울에 비친다면, 타인에게 주체하지 못한 울음을 토해내고 말았다면, 질병과 죽음 앞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게 된다면.
어떠신가요. 저 가정문의 주어가 자신이라면, 혹은 타인이라 하면요. 꺼림한 감정의 이름은 아마도 혐오와 수치심일 거예요. 동의하지 않는 분들도 언급된 상황을 긍정하긴 어렵겠죠. 당연해요. 의존, 노화, 질병, 눈물, 죽음. 인간의 ‘취약성’을 증명하는 이 모든 표식들을 미워하고 숨기도록 우리는 배워왔으니까요. 그 대신 믿어왔죠. 이성(理性)을 타고난 독립된 인간인 우리는, 미래를 보완하고 ‘건강한 몸’을 유지하여 불명예스러운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요. 그렇게 취약성에서 차차 물러나 ‘완전함’에 다다를 수 있다고 말이죠.
퍽 희망찬 믿음을 향해 저자는 말해요. '완전한 인간'에 관한 욕망은 모두 허상이라고요. 의역해보자면, 다 뻥이고 우린 된통 속았다고 말이죠.
그 근거로는 ‘배꼽’이 있어요. 웬 배꼽이냐 물으신다면 조금 케케묵은 이야기인데요. 플라톤의 <향연>에 나오길, 본래 구형(球形)이었던 인간은 신과 맞먹는 존재였대요. 하지만 이를 두고 볼 수 없었던 신들이 동그란 몸을 둘로 자르고 울퉁불퉁한 단면을 서로 마주 보게 했대요. 불완전하게 잘린 조각들이 바로 우리 각자의 몸인 거죠. 사나운 신들은 절단된 몸을 모아 묶어서 “오래전에 겪은 일에 대한 기억”을 표시해놓았는데, 그게 바로 배꼽입니다. 그러니까 배꼽은 ‘우리가 타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삶을 시작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주는 표식인 거죠.*
우리가 모두 배꼽을 가졌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요. 신에 의해 험난하게 갈라진 운명처럼, 우리의 삶은 불확실한 미래와 불가해한 불행들로 가득 차 있고 우리는 누군가를 필요로 할 수밖에 없다는 게요. 그건 절망일까요? 우리는 절망뿐인 운명을 배에다 달고 태어난 존재들인 걸까요?
이쯤에서 고백하자면, 사실 이 책에서 배꼽 얘기는 딱 두 페이지만 나옵니다. 막 중요한 언급도 아니고요. 그런데 배꼽으로 편지의 반을 채운 이유는, 이 이야기의 제목이 ‘사랑의 기원’이기 때문입니다. 절망도 혐오도 수치심도 아닌, 사랑의 기원이라서요.
우리가 모두 약하다면 세상에 내버려져질 사람은 없어요. 누구도 자기 자신이라는 이유로 비난받을 수 없죠. 비극과 불행을 홀로 짊어져서도 안돼요. 불완전하게 흔들리는 당신의 얼굴은 곧 나의 얼굴이니까요. 캄캄한 안개로 뒤덮인 삶에서는 서로의 손만이 길이 될 수밖에 없으니까요. 혐오와 수치심의 근저에 있던 우리의 취약성은, 본질적으로는 사랑의 근거라는 것. 배꼽에 관해 제가 기억하고 싶은 진실은 이쪽에 가깝습니다.
나는 왜 나이고 너는 왜 너인가. 이런 종류의 우울과 무력이 휩쓸 때마다 취약성을 받아들이는 일의 어려움을 절감해요. 하지만 어려운 만큼 취약성에서 길어 올린 사랑이란 얼마나 희박하고 귀중한 것인지 함께 절감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 미움처럼 쉽고 흔한 거 말고 어렵고 귀한 거 해봐요. 원래 어려운 게 재밌는 법이잖아요. 그렇죠?
-21.10.09. 사하 보냄.
*마사 너스바움, <혐오와 수치심>, 민음사, 334-345쪽.
*그림은 제니 사빌의 '지주봉 위의 제니 사빌 Saville's Propped'(확대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