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아렌트, 〈한나 아렌트의 말〉
안녕하세요, 사하입니다. 열 번째 편지네요.
일요일 아침은 언제나 서운하죠. 눈을 뜨자마자 시간이 흐른다는 사실에 섭섭해지는 기분이에요. 그건 늦잠을 자든 부지런을 떨든 마찬가지라 저는 (당연히) 한껏 늘어지기를 택합니다. 씻지도 않은 부스스한 꼴로 거실에 가족들과 둘러앉아 있으면 텔레비전에서 〈TV 동물농장〉이 시작되는데요. 적당히 뻔하고 적당히 흥미로운 동물들을 보면서 아이구 쟤 봐라, 어머머 어떡하냐, 거 참 웃긴 놈이네, 같은 감탄사를 주고받는 것은 제가 어렸을 때부터 이어진 일종의 가족 전통입니다.
그 시간을 즐겁게만 보낼 수 있다면 참 좋겠지만요. 동물의 생은 인간만큼, 아니 인간보다 험난해서 탄식마저 뱉지 못할 때도 많습니다. 가령 지난 7일 방송분에는 트럭에 묶인 채로 끌려간 개 두 마리를 구조하는 장면이 담겨있었고요. 10월 17일 방영된 〈곰은 살아있다〉 편에는 한 칸짜리 철창에 갇혀 죽어가는 사육곰 379마리의 이야기가 다뤄졌습니다. 동물을 때리고 굶기고 버려둔 인간들은 하나같이 말해요. ‘실수였다’, ‘아무 생각 없었다’, ‘학대인 줄 몰랐다’고 말이죠.
나쁜 새끼야 변명하지 말라고 중얼거리지만, 가끔은 저 말들이 변명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들 나름대로 사실을 말한 건지도요. 정말로 별 생각이 없었고, 정말로 무엇이 잘못인지 몰랐던 거죠. 그래서 살이 파이고 뼈가 드러난 동물을 아무렇지 않게 볼 수 있었던 겁니다. 그야말로 ‘아무 생각이 없는’ 얼굴로요.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 지시에 가장 ‘모범’적으로 응했던 아이히만은 재판 당시 “나는 내 책상에 앉아 나한테 주어진 일을 했습니다”라고 진술했죠. 자신은 별생각 없이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고요. ‘악의 평범성 the banality of evil’은 아이히만의 재판에 참여한 독일의 정치이론가 한나 아렌트가 언급한 용어로 유명합니다. 악이 평범하다는 말은 ‘우리 모두는 사실 나치와 같은 악마였다’ 같은 삼류 판타지 소설 도입부의 의미는 아니에요. 악의 본질이 실은 그렇게 하찮고 진부하게 생겨먹었다는 거죠. 어떤 심오한 의도도 깊이도 없이 ‘네가 겪는 고통을 생각하고 싶지 않다’는 단순한 심리. 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고 말하는 사람의 얼굴처럼 평범하고 시시한 것. 그래서 아무나의 얼굴이 되기 충분한 것. 그게 악이라는 거죠.
그 아무나의 얼굴을 뉴스에서 자주 목격하는 요즘입니다. 지난달 31일 대통령 후보를 뽑는 토론회에서 윤석열 후보는 ‘식용개 금지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식용개는 따로 키운다’ 같은 발언을 했죠. 청년 소수자들의 자살 소식이 줄이은 와중 유력한 대권 후보들은 줄줄이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의사를 드러냈고요. 생명과 생존의 문제에 ‘합의’와 ‘반대’를 들먹이는 얼굴들을 보면 진부한 악의 낯짝이란 어떤 모양인지 알 것 같아요. 아무 생각이 없는, 생각할 필요조차 모르는 얼굴. 누군가의 고통을 상상하지 못하는 말갛게 순진한 얼굴이요.
“‘멈춰서 생각해보라 stop and think’라는 영어 관용구가 있어요. 어느 누구도 하던 일을 멈추지 않는 한 생각에 잠길 수 없어요. (...) 책임에 대한 인식은 자신에 대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하고 있는 행위에 대해서 숙고하는 순간에만 발전할 수 있어요.” 〈한나 아렌트의 말〉 100쪽, 아이히만에 대한 인터뷰 중에서
‘애완동물’을 ‘반려동물’로 바꿔 쓰기 시작한 것은 동물을 사람의 소유물로 취급하는 시선에 대해 ‘멈춰서 생각’한 결과입니다. 올 6월에는 성폭력 피해자의 다양한 감정을 묵살하는 용어 ‘성적 수치심’을 ‘성적 불쾌감’으로 바꾸는 법안이 발의되기도 했고요. 휠체어 경사로와 수어 통역 방송은 더딘 속도로나마 늘어나고 있습니다. 누군가 멈추어 생각하지 않았다면, 문제를 문제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겠죠. 고통을 상상하고 책임을 숙고하느라 미간을 좁힌 골똘한 얼굴들이 없었다면요.
악의 평범성에 관한 이야기는 인간은 악으로 기울어질 수밖에 없다는 무력감을 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이히만이 그랬듯 ‘아무 생각 없음’으로 살아가다 보면 우리는 악의 얼굴과 닮아가게 되니까요. 하지만 저는 이 이야기를 꽤나 혁명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멈춰서 생각할 수 있다면, 내가 아닌 자의 고통을 상상할 수 있다면, 그 고통에 대한 책임을 숙고할 수 있다면, 우리가 선 바로 그 자리가 변화를 만드는 광장이 될 수 있기 때문이죠.
일요일의 오전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당신은 어떤 골똘한 얼굴로 멈추어 생각하고 계신가요. 당신의 사려(思慮)가 하찮은 악의 얼굴을 이겨내기를. 파도 같은 변화를 만들어내기를. 미간은 좁히고 입꼬리는 올린 얼굴로, 상상해봅니다.
2021.11.21. 사하 보냄.
아래는 참고한 기사입니다
http://www.wome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17291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1111723111953731?utm_source=naver&utm_medium=search#0DKU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15912006&code=61111511&cp=n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