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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하 Oct 31. 2021

강가에 선 당신에게

황인숙 시 <강>

안녕하세요, 사하입니다. 아홉 번째 편지예요.

시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가을은 주저 없이 물러나버렸고 이제 겨울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네요. 겨울, 하면 무엇을 떠올리시나요. 마트에 오순도순 쌓인 귤이라든가 털이 복슬복슬한 체크무늬 목도리라든가 바람에 섞인 개운한 냄새라든가. 그런 말랑한 낭만이 당신에게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서럽거나 시린 기억은 없었으면 해요. 무례한 소망일까요. 그렇다면 적어도 올 겨울은 덜 시리기를. 바래봅니다.

저는 심심하게도 겨울엔 수능 생각을 합니다. 모두에게 십 대는 제각기 다른 모양일 테지만 제 십 대는 좀 뻔했거든요. 더 이상 맞지 않는 교복을 끼워 입고서 온종일 앉아 문제를 풀었죠. 평탄하고도 고리타분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지나온 사람의 평가고요. 그 당시의 저는 칼등을 움켜쥔 듯 필사적이었습니다. 무엇이든 가만두지 않겠다는 마음을 몰래 품었던 것 같아요. 대부분의 입시생이 그렇듯 지독했죠.

그때 저는 받아들이질 못했어요. 내가 왜 힘들어야 하는지 말이죠. 그래서 왁왁 화를 냈습니다. 내가 이렇게 힘든 걸 알고 있냐, 이 지랄 맞은 세상아 내가 이렇게나 힘들다, 말이 되냐, 그런 말들을 칼처럼 벼리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억울했어요. 누구든 이 힘듦을 알아줘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매서워지기만 하는 칼날을 품고 살다가요. 모의고사를 치르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국어 시험지에 시 한 편이 실려 있었는데요. 전문은 이렇습니다.   


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미쳐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는지

나한테 토로하지 말라

심장의 벌레에 대해 옷장의 나방에 대해

찬장의 거미줄에 대해 터지는 복장에 대해

나한테 침도 피도 튀기지 말라

인생의 어깃장에 대해 저미는 애간장에 대해

빠개질 것 같은 머리에 대해 치사함에 대해

웃겼고, 웃기고, 웃길 몰골에 대해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

당신이 직접

강에 가서 말하란 말이다     


강가에서는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                           황인숙, <강>.     


시를 처음 읽을 땐 시인의 박력에 압도당하는 기분이었습니다. 다시 읽을 땐 뭐랄까,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할까요. 닥쳐,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거든요. 누구나 제 몫의 고통을 짊어지고 살아가기에, 누구에게도 네 고통을 알아줄 의무는 없다고요. 그러니 자기 고통에 심취해 아무 데나 침도 피도 튀기지 말고 강에나 가라고 말이죠. 강에나 가라는 말은 삶이나 살라는 말처럼 느껴졌습니다. 제 아픔만 제대로 알 뿐인 입은 다물고, 그냥 살라고 말이죠. 그 수밖에 없으니까. 우린 각자 살아갈 뿐이니까요.

너무해,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시에 사로잡힌 상태였어요. 결국 조그만 수첩을 찢어 시를 옮겨 적고 책상에 붙여두었죠. 두고두고 읽으면 마음에 품은 칼날이 조금씩 무뎌지는 것 같았습니다. 나의 고통은 내 몫이지만 어쨌든 강가에 서있는 것은 나 혼자만이 아니니까요. 조금 치졸할지 몰라도, 바로 그 점이 제겐 위로였습니다.

이 편지를 쓰기 위해 시를 몇 년 만에 다시 읽었는데요. 왠지, 쓸쓸했어요. 시의 청자이자 화자인 입장에서요. 외로웠습니다. 고통에 관한 한 우리는 고립된 세계에 살고 있고 모든 것은 개개인의 몫이라는 사실이요. 그래서 오늘은 이 시를 조금 반박하고 싶습니다. 멈출 수도 거스를 수도 없는 강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듯 살아가는 동안, 우리 서로의 고통을 모르는 입은 다물더라도 눈은 마주치자고요. 절대적으로 외로운 이 강가에, 당신이 거기에 서있음을 내가 알고 나도 여기 당신 옆에 서 있다. 그렇게 말하는 마음으로요. 눈은 마주 보고 싶습니다.

오늘이 지나면 겨울에 한 발자국 더 다가가 있겠죠. 살에 닿는 공기가 에일 수록 편지에 쓸 말은 당신의 안녕을 바란다는 것뿐입니다. 각자의 고통 앞에선 입을 다무는 것이 최선이라고 해도요, 눈을 마주치고 당신의 안녕을 바란다고 말하고 싶어요. 무의미라 할지라도, 무소용이라 할지라도, 그렇다고 할지라도. 바랄 수는 있잖아요.


21.10.31. 사하 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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