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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lla Jan 05. 2022

아랫집 윗집 사이에

정소현 <가해자들>



아이들이 두 살 무렵, 한 신축빌라로 이사를 했다. 익숙한 동네였고, 좋아하는 산 밑의 신축이라 깨끗하고 해가 잘 드는 집이었다.

이사를 하고 온 집에 육아 필수템이었던 두꺼운 알집매트를 깔았다. 단독주택이 아닌 이상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 층간소음은 피할 수 없는 걱정거리였다.


1년쯤 지나고, 아이들이 3살이 되면서 걷고 움직일 일이 많아졌다. 예민하고 조심성 많은 아이들이었지만, 어느 날 오후, 마침내 아랫집 사람이 초인종을 눌렀다. 아파트가 아니었기 때문에 관리사무소를 통한 인터폰은 없었다.


젊은 여자분이었다. 자신이 밤에 일을 하고 낮에 자야 하는 데 시끄럽다고 했다.

나는 너무 미안하다고, 조심하겠다고, 진심으로 미안한 마음에 말했다.


여자는 무표정한 표정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남에게 피해 주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나에겐, 날벼락같은 일이었다. 평소에도 아이들과 자주 외출을 하던 나는 그날 이후로 더 자주, 거의 매일 유모차에 아이 둘을 태우고 근처 공원이나 쇼핑몰로 나갔다. 어린이집에 다니지 않는 아이들의 에너지를 어떻게든 감당해야 했다.


그렇게 조심하던 어느 날, 그분이 또 올라왔다. 이번엔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는 조용히 해달라는 말만 하고 사라졌다.


그날 이후, 나는 이사를 생각했다.


아이들은 커 갈 테고, 활동량은 더 늘어날 텐데, 기관에 보낼 생각이 없는 나에게 종일 집에서 아이들을 조용하게 만들 자신이 없었다. 밤에 일하는 사람 때문에 우리가 밤에 깨어 있을 수는 없었다.


당시 아이들은 8시면 자고, 7시에 일어나는, 어찌 보면 지극히 정상적인 수면 패턴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아이들의 낮 활동을 막을 수도 없었다. 게다가 매일 낮마다 밖으로 나가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비가 오거나 눈이 오거나 피곤한 날이면, 나도 내 집에서 편히 쉬고 싶었다.





오래전부터 단독주택에서 살고 싶은 바람이 있었다. 아이들이 편하게 뛰어놀게 해주고 싶었다. 남편이 집에 있는 주말이면, 혼자 온 동네를 돌아다니며 집을 알아봤다. 여유 자금 같은 건 없었다. 대출 잔액이 늘겠지만, 그 집에서 더 살 수는 없었다. 오래된 주택이 많은 동네라, 급매로 나온 작은 집을 찾아 헤맸다.


마침내, 30년이 넘은 낡고, 작은 집을 구했다. 돈이 모자라 남편과 둘이 셀프 인테리어를 하기로 했다. 폐가와 비슷한 집은 남편과 둘이 밤잠을 설치며, 공사를 했다.

하지만 슬프게도 그 집은 내가 오랫동안 꿈꿔왔던 단독주택의 꿈을 산산이 깨버렸다.

아파트라고 모두 같은 아파트가 아니듯, 주택이라고 다 같은 주택은 아니었다.

자신에게 맞는 집이 있다는 걸, 그 집에 살면서 깨달았다.




며칠 전 정소현 소설가의 <가해자들>이라는 소설을 읽었다.


이 소설의 중심 사건은 '층간소음'이다.


낡고 오래된 1동짜리 아파트의 아래 윗집에서 벌어지는 이야기.

만약 내가 당사자라면 극심한 고통과 두려움을 느낄 만한 이야기.


누군가는 잘못을 인정해야 하는데, 모두들 자신이 피해를 입은 가해자라고 주장하는 상황이다. 물론 처음엔 상식적으로 미안하다는 말과 조심하겠다는 말이 오간다. 하지만 이야기 속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1111호 여자에게는 마음의 병이 있다. 그녀는 작은 소리에도 예민해져 병적으로 윗집과 아랫집을 괴롭힌다.


시어머니와 남편에게 받은 그녀의 상처가 이해되면서도, 결국 처절하게 무너지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마음이 좋지 않았다. 이런 사람이 내 이웃이라면, 아랫집에 살고 있다면, 윗집에 살고 있다면, 아마 나는 단 한순간도 버티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아래, 윗집 모두 이사를 나가지만, 그것으로 모든 게 끝나지는 않았다.

결말은 이제는 단골 뉴스가 돼버린 끔찍한 층간소음 사건으로 이어진다.



소설을 읽고,

결국 위 아랫집 모두 이사를 가는 상황과,

누군가 때문에 누군가는 삶의 터전을 포기하는 모습을 보며,

과연 더 나은 방법은 없는 것인지 답답했다.


나는 지금 아파트에 살고 있다.

여전히 매일매일 층간소음을 걱정한다.

아이들이 조금만 뛰어도 잔소리를 한다.

아랫집에는 한없이 미안한 마음이고,

어린아이들과 어른들이 쿵쾅거리는 윗집의 소음에는 최대한 무뎌지려고 애쓰고 있다.






지금도 가끔 그때 생각이 난다.


만약 이사를 하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생겼을까.

더 많이 상처를 받고 상처를 주었겠지.

무엇보다 내 아이들에게 그 불안과 고통을 그대로 느끼게 해야 했을 것이다.



'서로 조금씩만 조심하고 이해하면 된다'는 어쩌면 공익광고에서나 가능한 말이 아닐지, 책을 덮으며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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