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원 감사관과의 담판 이후, 일주일이 지났다. 식당은 표면적으로는 예전과 다를 바 없어 보였지만, 그 공기 속에는 미세한 변화가 감지되었다. 그것은 승리감이라기보다는, 폭풍우가 지나간 뒤 지반이 단단해질 때 느껴지는 묵직한 안정감이었다. 우리는 알게 되었다. 이 도시의 견고한 흰색 벽에도 숨구멍은 필요하며, 우리가 바로 그 숨구멍이라는 사실을.
나의 일상 또한 변하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강의실 맨 앞자리에 앉아 교수의 말을 받아 적는 ‘모범생’이었지만, 이제 그 행위는 맹목적인 복종이 아니었다. 나는 도시의 언어를 배우고 있었다. 그들의 논리로 그들을 설득하고, 나의 소중한 샛강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승리의 여운 속에서도 마음 한구석에 걸리는 가시가 있었다. 하림이었다.
정도원 사건이 해결된 지 일주일이 넘도록,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평소라면 이틀이 멀다 하고 찾아와 스케치북을 펼쳐놓고 재잘거렸을 아이였다.
'시험 기간인가?', '과제가 많은가?'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불길한 예감이 안개처럼 스며들었다.
그날은 유독 안개가 짙어, 바로 앞의 보도블록조차 분간하기 힘든 저녁이었다. 학교 도서관에서 나와 식당으로 향하던 나는, 인파 속에서 익숙한 실루엣을 발견했다.
수많은 흰색 유니폼의 물결 속에서, 유난히 작고 위태로워 보이는 어깨. 캔버스 백을 힘없이 늘어뜨린 채, 흐름에 떠밀리듯 걷고 있는 뒷모습. 하림이었다.
"하림아!"
나의 부름에 그녀의 어깨가 눈에 띄게 움찔했다. 그녀는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안개 사이로 드러난 그녀의 얼굴을 본 순간, 나는 걸음을 멈칫했다.
그것은 내가 알던 하림의 얼굴이 아니었다. 호기심으로 반짝이던 눈동자는 초점을 잃고 탁하게 풀려 있었고, 생기 넘치던 입매는 메마른 채 굳게 닫혀 있었다.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텅 빈 껍데기 같았다.
"…어? 오빠."
목소리마저 모래가 낀 듯 거칠었다.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반가움보다는 당혹감이 스친 표정으로 시선을 피했다.
"여기서 보네. 잘 지냈어? 왜 통 식당에 안 왔어. 다들 걱정하고 있어."
나는 최대한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하림은 내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가방끈만 만지작거렸다. 그녀의 손끝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아… 그게…."
그녀는 말끝을 흐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마치 누군가에게 쫓기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불안해 보였다. 한참의 침묵 끝에, 그녀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닫은 거 아니었어요?"
"뭐?"
"식당요. 문… 닫은 줄 알았어요."
하림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말을 이었다.
"지나가다 들었는데, 시청 감사국에서 나왔다면서요. 깐깐하기로 소문난 사람이… 그래서 생각했죠. 아, 결국 걸렸구나. 없어졌겠구나."
그녀의 목소리에는 깊은 체념이 배어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식당의 안부를 묻는 것이 아니었다. '결국 그렇게 될 줄 알았다'는, 시스템에서 벗어난 것들은 살아남을 수 없다는 패배주의적 확신이었다.
"가보고 싶었는데… 무서웠어요. 문에 '폐쇄 조치' 딱지가 붙어 있거나, 텅 빈 가게를 보게 될까 봐. 그 꼴을 보면… 정말로 다 끝났다는 게 실감 날 것 같아서요. 내가 좋아하는 장소가, 또 사라졌다는 걸 확인하기 싫어서… 그냥 도망쳤어요."
그녀의 말을 듣고서야 나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 하림은 몰랐구나.
우리가 정도원 감사관을 설득하고 승리를 자축하느라 들떠 있을 때, 정작 그녀는 식당이 문을 닫았을 거라 지레짐작하고 홀로 끙끙 앓고 있었던 것이다.
생각해보니 정신이 없다는 핑계로 그녀에게 따로 연락할 생각조차 못 하고 있었다. 가장 먼저 기뻐해 줄 사람이라고 생각만 했지, 정작 그 사람이 겪고 있을 불안은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는 사실에 콕 찌르는 듯한 미안함이 밀려왔다.
지난 일주일간 혼자서 마음 졸였을 걸 생각하니 짠하면서도, 한편으론 그게 오해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났다.
나는 축 쳐진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감싸 쥐었다.
"도망칠 필요 없어. 안 망했으니까."
"…네?"
하림이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안 망했다고. 오히려 시청에서 '조건부 승인'까지 받아냈어. 기석 아저씨랑 그 아이, 사장님까지 다 합세해서 그 깐깐한 감사관을 설득했거든. 지금 아주 멀쩡하게 영업 중이야. 오늘도 맛있는 냄새가 진동을 한다고."
"지… 진짜요? 정말로요?"
하림의 탁한 눈동자에 아주 희미한 빛이 스쳤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무용(無用)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가장 강력한 유용(有用)함의 논리를 이겼다는 사실이 그녀에게는 기적처럼 들리는 듯했다.
"그럼. 내 눈으로 직접 확인시켜 줄게. 가자."
나는 하림의 등을 떠밀었다. 그녀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하지만 아까보다는 조금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나를 따라왔다.
'딸랑-'
익숙하고 경쾌한 종소리와 함께 낡은 나무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훅 끼쳐오는 훈훈한 공기, 달그락거리는 접시 소리, 그리고 향신료와 버터가 뒤섞인 맛있는 냄새가 우리를 맞이했다.
"어! 하림이다!"
주방에서 나오던 그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겼다. 카운터에 있던 사장님도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아이고, 이게 누구야. 왜 이렇게 뜸했어! 보고 싶었잖아."
변함없는 풍경. 변함없는 온기.
하림은 입구에 서서 그 풍경을 눈에 담았다. 꿈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듯, 그녀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식당의 공기가 그녀의 폐부로 들어가자, 잔뜩 웅크리고 있던 그녀의 어깨가 아주 조금 펴지는 것이 보였다.
"…다행이다. 진짜… 다행이다."
그녀가 울먹이듯 중얼거렸다.
하지만 안도는 잠시였다. 우리는 중앙 테이블이 아닌, 구석의 조용한 자리로 안내받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하림의 표정은 다시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식당이 건재하다는 사실에 안도했지만, 그것이 그녀 자신이 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식당은 승리했지만 어디까지나 외부의 세계이다. 그녀 내부의 세계는 여전히 패배감에 젖어 있었다.
"하림아, 뭐 좀 먹을래? 사장님이 네가 좋아하는 크림 리조또 해준다고 하시는데."
내가 묻자, 하림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생각 없어요. 그냥 물만 마실게요."
그녀는 테이블 위에 놓인 물컵만 뚫어지게 응시했다. 식당에 들어오기 전보다 더 깊은 침묵이 그녀를 감쌌다. 나는 직감했다. 아까 길에서 그녀가 보였던 그 '죽은 눈'의 원인은 식당 걱정 때문만이 아니었다. 더 깊고, 더 아픈 무언가가 있었다.
그때, 주방에서 그 아이가 다가와 따뜻한 차 한 잔을 내려놓고는 내게 눈짓을 했다. '무슨 일이야?'라고 묻는 눈빛이었다. 나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나도 몰랐다.
나는 찻잔의 온기를 손바닥으로 느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까 길에서 봤을 때, 단순히 식당 걱정하는 얼굴이 아니었어. 무슨 일 있었지? 학교에서."
하림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오빠는, 식당을 지켜냈잖아요."
한참 만에 그녀가 뱉은 첫마디였다.
"… 결국 이겨냈잖아요. 그런데 저는…."
그녀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저는 실패했어요."
"실패라니?"
"오늘 비평 시간이 있었어요. 졸업 작품 중간 점검이었는데…."
그녀는 가방 밑바닥에 깔려 있던, 구겨진 스케치북을 꺼냈다. 하지만 펼치지는 못하고 그 위에 손을 얹은 채 말을 이었다.
"나름대로 타협하려고 했어요. 도시가 원하는 기능과 효율을 맞추면서도, 제가 좋아하는 곡선이나 색채를 아주 조금만, 숨구멍처럼 남겨두고 싶었어요. 그래서 가로등을 설계했는데… 빛이 퍼지는 각도를 계산하면서 갓의 형태를 부드러운 곡선으로 만들었거든요."
그녀의 눈에 물기가 차올랐다.
"그런데 교수가 제 도면을 보더니 그러더라고요. '이 곡선의 기능적 근거가 뭔가? 이 형태가 조도 유지에 수치적으로 어떤 이득을 주나?'"
나는 침묵했다. 정도원이 나에게 던졌던 질문들과 똑같았다.
'이것의 효용은 무엇인가.'
"제가 우물쭈물하니까, 교수가 도면을 바닥에 던지면서 말했어요. '이 도시에 장식품은 필요 없다. 기능이 없는 선(線)은 쓰레기다. 너는 지금 쓰레기를 만들어놓고 디자인이라고 우기는 건가?'"
기능이 없는 선은 쓰레기다.
그 말은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그녀가 평생을 사랑해온 ‘아름다움’이 ‘무가치함’으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오빠, 더 비참한 게 뭔지 알아요?”
하림이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젖은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그 말을 듣는데… 반박을 못 하겠는 거예요. 화가 나는 게 아니라, ‘아, 맞다. 내가 틀렸구나. 내가 쓸모없는 짓을 하고 있구나’ 하고 인정하게 되더라고요. 오빠처럼 싸울 용기도 안 났어요. 왜냐면… 저는 제 그림이 세상에 무슨 도움이 되는지 저 스스로도 증명을 못 하겠거든요.”
그녀의 자조 섞인 고백을 듣는 순간, 내 머릿속에서 날카로운 문장 하나가 섬광처럼 스쳐 지나갔다.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
어디선가 본 이 문장은, 이 안개 낀 도시에서는 단순한 디자인 철학을 넘어 생존의 주요 법칙이자 헌법과 같았다.
모든 존재는 명확한 목적이 있어야 하며, 그 목적에 기여하지 않는 형태는 불필요한 ‘장식’이자 제거해야 할 ‘죄악’으로 규정된다. 그것이 우리가 유치원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진리였다.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입안이 썼다.
하림에게 무슨 말이라도 해주고 싶었지만, 혀가 굳은 듯 떨어지지 않았다.
교수의 말은 잔인할 정도로 폭력적이었지만, 이 도시의 논리 체계 안에서는 반박 불가능한 '정답'이었기 때문이다.
‘기능이 없는 선은 쓰레기다.’
그 명제 앞에서, "아름다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는 위로의 말은 감상적일 뿐인 공허한 소리일뿐 하림에게 닿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한 명의 교수와 싸우고 있는 게 아니었다. 효율성이라는 거대한 중력, 이 도시를 지탱하는 설계도 그 자체와 싸우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그녀의 절망 앞에서 그 어떤 논리적인 방어막도 쳐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스케치북을 밀어버렸다.
“제 그림은… 그냥 예쁜 쓰레기일 뿐이에요. 제가 좋아하는 몽상, 감정, 색깔… 도시를 굴러가게 하는 데는 하나도 도움이 안 되는 불량 부품들.”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흐느꼈다.
“나도… 내가 불량품이라는 걸 인정해야 하나 봐요.”
그 거대한 이념의 벽 앞에서 감성적인 위로는 얼마나 무력한가. 내가 침묵 속에서 괴로워하고 있을 때였다.
식당의 공기가 바뀌었다.
그때였다. 식당의 공기가 바뀌었다.
달콤하고, 어딘가 타는 듯한 냄새가 은은하게 퍼져나갔다. 그것은 묵직한 식사 냄새가 아니었다. 아주 섬세하고, 부서질 듯 위태로운 단내였다.
그 아이가 우리 테이블로 다가왔다. 녀석의 손에는 평소 쓰던 투박한 그릇이 아닌, 검은색의 매끄러운 접시가 들려 있었다. 그리고 그 접시 위에는, 황금빛 구름 같은 것이 소복이 내려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