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당 문을 박차고 나온 나를 맞이한 것은, 기다렸다는 듯 온몸을 휘감는 차가운 밤안개였다.
폐부 깊숙이 스며드는 습기가 뱃속에 남아있던 리조또의 온기를 빠르게 식혀나갔다. 나는 도망쳤다.
안개로부터 도망쳐 색깔 있는 세계로 들어갔다고 믿었으나, 결국 그 색채의 현란함 속에서 나 자신의 투명함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안개 속으로 도망쳐 나온 것이다.
어디로 가야 할까.
기숙사로 돌아가면 하얀 천장과 마주해야 했다. 도서관으로 가면 숨 막히는 정적과 마주해야 했다.
갈 곳이 없었다. 샛강을 찾았다고 믿었지만, 나는 여전히 본류에 섞이지 못한 채 강둑을 서성이는 이방인일 뿐이었다.
"오빠."
안개 속에서 희미한 부름이 들렸다.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았다. 가로등 불빛이 닿지 않는 어둠 속에서 하림이 숨을 헐떡이며 서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굳게 닫힌 스케치북이 들려 있었다. 식당에서 즐겁게 낙서를 하던 조금 전의 모습과는 달리, 그녀의 어깨는 안개에 젖어 무거워 보였다.
"왜… 따라왔어."
내 목소리는 건조하게 갈라져 나왔다. 하림은 잠시 숨을 고르더니,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오빠가 두고 간 게 있어서요."
그녀는 내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내가 식탁 위에 버려두고 온 낡은 노트였다.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가'를 적어 내려갔던, 나의 치기 어린 탐구 생활이 적힌 그 노트.
나는 그것을 받아 들지 않고 멍하니 바라보았다. 지금의 나에게 그 노트는 희망의 기록이 아니라, 실패의 증거물처럼 보였다.
"그냥… 둬도 되는데."
"어떻게 그냥 둬요."
하림이 단호하게 말했다.
"오빠가 나한테 그랬잖아요. 엉망진창이어도 괜찮다고. 기능 같은 거 증명하지 않아도,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그녀는 노트를 내 손에 억지로 쥐여주었다. 그녀의 손끝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 차가움이 나를 현실로 잡아끌었다.
"전 학교에서 매일 깨져요. 오늘도 교수님이 제 과제를 보고 한숨을 쉬었어요. '너는 왜 자꾸 궤도를 벗어나려 하냐'고. 친구들은 저를 이상하게 봐요. 취업 준비는 안 하고 쓸데없는 그림만 그린다고."
하림은 씁쓸하게 웃었다.
"무서워요, 사실. 이러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될까 봐. 이 도시에서 기능하지 못하는 부품은 폐기되니까. 오빠 말대로 내 맘대로 선을 긋는 건 짜릿하지만… 그 대가는 생각보다 춥더라고요."
그녀는 자신의 얇은 옷깃을 여미며 몸을 떨었다.
그것이었다. 내가 외면하고 싶었던 진실.
나다움을 선택한다는 것은, 단순히 좋아하는 색을 칠하는 놀이가 아니었다.
그것은 이 도시가 제공하는 '안전'이라는 두꺼운 외투를 벗어던지고, 맨몸으로 안개 속의 한기를 견뎌야 하는 고행이었다.
"그런데도…."
하림이 고개를 들어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는 흔들리고 있었지만, 도망치지는 않고 있었다.
"저는 계속 그릴 거예요. 춥고 불안해도, 남의 선을 따라 그리면서 편안한 것보단… 내 선을 그리면서 떠는 게 더 나으니까. 오빠가 가르쳐줬잖아요. 그게 '살아있는' 거라고."
하림의 말은 부메랑이 되어 나를 쳤다.
나는 그녀에게 용기를 주었지만, 정작 나는 그 용기가 가져올 추위를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나는 붉은 스튜를 먹으며 '살아있음'을 예찬했지만, 식당 문을 나서는 순간 닥쳐올 고립은 두려워했다.
"가져가요. 오빠의 선이잖아요. 삐뚤빼뚤하고 엉망이어도… 그게 오빠니까."
하림은 내 손을 한 번 꾹 잡아주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시 식당 쪽으로 뛰어갔다.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은 위태로워 보였지만, 동시에 눈물겹도록 선명했다.
나는 손에 들린 차가운 노트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선택했다. 추위를 견디기로.
그렇다면 나는?
나는 노트를 주머니에 구겨 넣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안개는 더욱 짙어져, 이제는 한 치 앞도 분간하기 어려웠다.
발길이 닿은 곳은 시청 앞 광장이었다.
도시의 심장부. 가장 완벽한 흰색과 가장 완벽한 질서가 지배하는 곳.
늦은 밤이었지만 시청의 불은 꺼지지 않았다. 거대한 흰색 건물은 안개 속에서도 위압적인 빛을 뿜어내며 도시의 밤을 감시하고 있었다.
그 광장 한구석, 가로등 아래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흰색 정장. 날카로운 금속테 안경.
정도원이었다.
그는 손에 든 태블릿 PC를 보며 무언가를 체크하고 있었다. 아마도 광장의 조도나 안개의 농도, 혹은 보도블록의 청결 상태를 점검하고 있을 터였다.
평소라면 그를 피해 돌아갔을 것이다. 그가 상징하는 억압과 통제가 싫어서.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내 발걸음은 자석에 이끌리듯 그를 향했다.
나는 그를 '이해'하고 싶었다. 아니, 마주해야 했다.
기석 아저씨의 말대로 그가 단순한 악당이 아니라 '무너질까 봐 두려워하는 수호자'라면, 나는 그 두려움의 실체를 확인해야 했다.
"감사관님."
내가 부르자, 정도원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안경 너머의 회색 눈동자가 나를 스캔하듯 훑어내렸다. 그는 나를 알아보았지만, 놀란 기색은 없었다.
"학생이군요. 통금 시간이 곧일텐데. 늦지 않게 돌아가세요."
그의 첫마디는 여전히 규율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건조한 목소리 밑바닥에 깔린 피로감을 느낄 수 있었다.
"야근하십니까?"
"도시는 잠들지 않으니까요. 누군가는 깨어서 시스템의 오작동을 감시해야 합니다."
그는 다시 시선을 태블릿으로 돌렸다. 나는 그 옆에 나란히 서서, 그가 보고 있는 풍경을 함께 바라보았다.
질서 정연하게 늘어선 건물들, 일정한 간격으로 깜빡이는 신호등, 쓰레기 하나 없이 깨끗한 거리.
숨 막히도록 완벽한, 그러나 죽어있는 풍경.
"…안 힘드십니까?"
내 뜬금없는 질문에 그의 손가락이 멈췄다.
"뭐가 말입니까."
"모든 걸 통제해야 한다는 거요. 작은 얼룩 하나, 1분의 오차도 용납하지 않고… 그렇게 팽팽하게 당겨진 줄처럼 사는 거. 외롭지 않으세요?"
정도원은 태블릿을 내리고 나를 쳐다보았다. 경멸이나 무시가 아닌, 기이한 질문을 들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는 잠시 침묵하더니, 쓴웃음인지 비웃음인지 모를 묘한 표정을 지었다.
"외로움이라. 학생은 아직도 감정 놀음이나 하고 있군요."
그는 광장의 바닥을 구두 굽으로 툭툭 쳤다.
"이 바닥을 보십시오. 수천수만 개의 벽돌이 오차 없이 맞물려 있습니다. 덕분에 사람들은 발이 빠질 걱정 없이, 넘어질 걱정 없이 걷습니다. 만약 벽돌 하나가 '나는 둥글게 살고 싶어'라며 제멋대로 모양을 바꾼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는 차갑게 말했다.
"틈이 생기고, 그 틈으로 물이 스며들고, 결국엔 지반이 무너집니다. 당신들이 말하는 그 '다름'과 '자유'라는 것. 그것이 낭만적으로 들릴지는 몰라도, 시스템의 입장에서는 붕괴의 씨앗일 뿐입니다. 아니 애초에 자유는 규칙의 보호 아래 개인이 누리는 '마음의 평온'과 안전에 기반한것입니다. 무제한의 방종이 아닌 규칙의 테두리 안에서 보장되는 안전한 삶이죠."
그는 나에게 한 걸음 다가왔다. 그의 몸에서 소독약 냄새와 차가운 금속 냄새가 났다.
"나는 외롭지 않습니다. 나는 '안전'을 지키고 있으니까. 나의 통제가 있기에 당신들이 그 식당에서 붉은 스튜를 먹으며 낭만을 떨 수 있는 겁니다. 무질서가 거리를 뒤덮지 않도록, 누군가는 오물을 뒤집어쓰고 배수구를 관리해야 하니까."
나는 반박할 수 없었다.
그의 말이 맞았다. 그의 억압은 나를 질식하게 했지만, 동시에 이 도시를 지탱하는 뼈대였다.
나는 그 뼈대 위에서 안전하게 걸으며, 그 뼈대가 딱딱하다고 불평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악이 아니었다. 그는 필요악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냥 '필요' 그 자체였다.
나는 그를 인정해야 했다. 그의 흰색은 나의 색을 지우려는 폭력이 아니라, 색들이 섞여 검은색이 되지 않도록 바탕이 되어주는 캔버스였다.
"…그렇군요. 감사관님 덕분에, 우리는 넘어지지 않고 걷고 있었네요."
나의 순순한 인정에 정도원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는 내가 화를 내거나 논쟁을 벌일 거라 예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감사관님."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덧붙였다.
"벽돌이 꽉 맞물려 있으면 튼튼하겠죠. 하지만 숨 쉴 구멍이 없으면, 그 안의 흙은 썩어버릴지도 모릅니다. 감사관님이 지키려는 게 '무너지지 않는 도시'라면, 가끔은 벽돌 사이에 핀 이끼 정도는 눈감아주셔도 되지 않을까요? 그게… 도시가 숨을 쉬고 있다는 증거니까요."
정도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안경을 고쳐 쓰며 나를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그의 눈빛이 아주 잠시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동요라기보다는, 낯선 데이터를 입력받은 컴퓨터의 연산 지연 같은 것이었다.
"…통금 시간이 곧입니다. 벌점을 받기 싫으면 서두르는 게 좋을 겁니다."
그는 등을 돌렸다. 대화를 거부하는 몸짓이었지만, 나를 쫓아내거나 비난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그가 보일 수 있는 최대의 환대였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기숙사로 돌아오는 길, 안개는 여전히 차가웠지만 더 이상 나를 옭아매는 사슬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은 더 무거워졌다.
하림은 추위를 견디며 자신만의 선을 긋기로 했다.
정도원은 고독을 견디며 도시의 선을 지키기로 했다.
그들은 각자 자신의 대가를 치르며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나는 기숙사 방 책상 위에 놓인 한 장의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졸업 후 진로 희망 조사서]
내일 아침까지 제출해야 하는 서류였다.
빈칸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1지망: 시청 행정직
정도원이 보여준 안정, 질서, 흰색의 세계다.
이곳을 선택하면 나는 평생 안전할 것이다. 부모님이 기뻐할 것이고, 실패할 확률은 제로에 수렴한다. 하지만 나는 나의 색을 지워야 한다. 붉은 스튜의 맛을 잊은 척, 안개 밖의 하늘을 보지 못한 척 살아야 한다.
2지망: _________
하림이 보여준 불확실, 혼돈, 다채로움의 세계.
이곳에는 정해진 이름조차 없다. 내가 직접 적어 넣어야 한다. '요리사', '탐험가', 아니면 그저 '나 자신'.
이곳을 선택하면 나는 매일 흔들릴 것이다. 하림처럼 비난받을 것이고, 굶주릴지도 모르며, 옹벽 밖으로 밀려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내 보폭으로 걸을 수 있다.
펜을 잡은 손이 떨렸다.
이것은 점심 메뉴를 고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흰색 잉크로 나를 덮어버릴 것인가, 아니면 내 안의 붉은 잉크를 터뜨려 이 흰색 종이를 더럽힐 것인가.
식당에서의 따뜻했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동시에, 차가운 거리에서 떨고 있던 하림의 어깨와, 견고하게 서 있던 정도원의 뒷모습도 떠올랐다.
안전한 질식인가, 위험한 호흡인가.
나는 펜촉을 종이 위에 가져갔다.
잉크가 종이에 닿기 직전, 펜 끝이 허공에서 멈췄다.
밤새 안개는 창문을 두드렸고,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선택의 시간은, 잔인하게 밝아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