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석 아저씨와의 대화를 마치고 다시 안개 낀 거리로 나섰다. 빈칸을 채워 넣은 진로 희망 조사서는 이미 내 손을 떠났다. 내 선택이 어떤 파장을 불러올지 아직 알 수 없었지만,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았던 무거운 돌덩이는 조금 가벼워진 듯했다. 아저씨의 말대로, 중요한 것은 종이 위의 글씨가 아니라 그 이후의 내 행동과 증명일 테니까.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우리의 아지트, 낡은 목조 문이 있는 식당으로 향하고 있었다. 골목 어귀에 다다랐을 때, 짙은 안개 속에서 유독 선명한 색채 하나가 시야에 꽂혔다.
붉은색 스카프.
채윤 누나였다. 그녀는 식당에 들어가지 않고 문밖의 가로등 아래에 기대서서, 차가운 안개를 깊게 들이마시고 있었다.
"채윤 누나."
나의 부름에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맑고 시원스러운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어, 모범생. 표정이 좋아졌네. 무슨 큰일이라도 치르고 온 얼굴인데?"
"오늘, 졸업 후 진로 희망 조사서를 냈거든요."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특유의 시원한 웃음을 터뜨렸다.
"오, 그래? 그래, 그래서 어디로 가기로 했는데?”
"비밀입니다. 어차피 앞으로 제가 증명해 내야 할 일이니까 직접 봐주세요."
나의 대답에 채윤은 흥미롭다는 듯 턱을 괴고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나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았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녀의 직관적이고 거침없는 태도는 나에게 벅차고 어지러운 것이었다. 그녀는 세상을 분석하는 나와 달리 세상을 '체험'하고 '반응'하는 사람이었으며, 내가 안전한 거리에서 관조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내 궤도를 흩트려놓는 거대한 타자(他者)였다.
"누나를 처음 봤을 때, 저는 누나가 참 불편했어요."
"직구네. 나도 알아. 넌 속으로 세 번은 삼켜야 말을 뱉는 애고, 나는 생각나는 대로 뱉는 사람이니까."
"맞아요. 우리는 달랐죠. 저는 누나의 무모함을 이해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제가 나만의 색을 찾고, 저 스스로가 단단해지면 언젠가 누나를, 그리고 이 세상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어요. 흰색의 세계가 나를 억압했던 것처럼, 나 역시 내가 정립한 논리로 세상을 완벽하게 파악해야만 직성이 풀렸으니까요."
채윤은 가로등에 기댔던 몸을 떼고 내 앞으로 한 걸음 다가왔다.
"그래서? 지금은 날 이해할 것 같아?"
"아니요."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영원히 이해할 수 없을 겁니다. 누나는 저와는 전혀 다른 법칙으로 돌아가는 우주니까요. 그리고 저는 누나를 온전히 이해하려 들거나 저의 세계로 편입시키려는 시도가 얼마나 오만하고 폭력적인 짓인지 깨달았습니다. 이 전에도 똑같이 깨달았다고는 했는데 그때는 사실 그저 존중하면 되는거지라는 마음이었던것 같아요."
이 도시는 언제나 '무한한 긍정'과 '완벽한 융화'를 강요했다. 안개는 모든 건물의 윤곽을 뭉개고 사람들의 표정을 지워, 하나의 거대한 흰색 덩어리로 만들었다. 서로가 다르다는 사실을 지워버림으로써 갈등을 없애고, 그것을 '평화'와 '안전'이라 불렀다.
하지만 그것은 살아있는 것이 아니었다. 형태가 기능에 복종하듯, 개인이 전체에 완벽히 융화되는 것은 곧 개별적 자아의 소멸이자 '상냥한 질식'일 뿐이었다. 나는 당시 다름을 인정한다 했지만 그저 다르구나하고 외면하고 회피하고 있었던것 같다. 그와중에 예를 다하는걸 존중이라 포장하고 말이다. 알록달록한 포장지로 포장했을뿐 알맹이는 하얀 도시와 똑같았다.
"우리가 완벽하게 서로를 이해하고 섞일 수 있다는 건 환상이에요. 만약 우리가 억지로 섞이려 했다면, 붉은색과 푸른색이 만나 결국 이 도시의 안개처럼 탁하고 지루한 무채색 덩어리가 되어버렸겠죠."
채윤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나와 타자 사이에는 결코 넘을 수 없는 선이 존재한다는 걸 인정하기로 했어요. 누나는 누나고, 저는 저죠. 우리는 완전히 맞닿을 수 없고, 때로는 부딪혀 불협화음을 낼 겁니다. 하지만 그 '필연적인 부정'. 너는 내가 아니라는 그 명백한 거절과 경계선이 있어야만, 우리는 각자의 색을 잃지 않을 수 있어요."
나는 지난번 그녀와 마주 앉아 붉은 도미 요리를 먹었던 식탁을 떠올렸다.
완전한 타자가 나의 영역을 파괴하지 않고 내 곁에 공존할 수 있다는 사실.
"우리는 보색(補色)이니까요.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거나 섞이지 않더라도, 그저 나란히 서서 끊임없이 부딪히고 상호작용하는 것만으로도 서로를 가장 선명하게 빛내줄 수 있죠. 전 다르다고 말해 놓고 결국 잘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타인과 같아지려했죠. 저는 이제 억지로 섞이려 하지 않을 겁니다. 제 색깔을 지키면서, 누나라는 낯선 세계와 기꺼이 부딪치며 살아갈 거예요. 그 충돌이 만들어내는 파음(破音)이야말로, 이 하얀 도시에서 우리가 살아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일 테니까요."
채윤은 가만히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늘 장난기 넘치던 그녀의 맑은 눈동자에 드물게 진지한 빛이 어렸다. 그녀는 손을 뻗어 내 어깨를 가볍게, 하지만 단단하게 툭 쳤다.
"합격."
그녀가 활짝 웃었다. 안개 속을 찢고 들어오는 강렬한 햇살 같은 웃음이었다.
"토기가 뭉게질까 봐 조마조마했는데, 이제 진짜 튼튼한 도자기가 됐네. 그래, 네 말이 맞아. 억지로 이해하는 척, 섞이는 척하는 건 이 징그러운 안개들이나 하는 짓이지. 넌 네 보폭대로 걸어. 난 내 멋대로 뛸 테니까. 그러다 한 번씩 식당에서 마주쳐서 맛있는 거나 같이 먹으면 그만인 거야. 서로의 영역을 침범할 일 없는 안전한 친구로서."
그녀는 몸을 돌려 식당의 낡은 나무 문손잡이를 잡았다.
"들어가자. 오늘은 왠지 네가 쏘는 밥을 먹어야 할 것 같으니까."
'딸랑-'
경쾌한 종소리가 울렸다. 문이 열리자 짙은 향신료의 향기와 따뜻한 온기가 안개의 장막을 밀어내며 우리를 맞이했다.
나는 더 이상 이 거대한 세계가 두렵지 않았다. 내가 나로서 존재하고, 타인이 타인으로서 존재하는 한, 우리의 경계선에서 발생하는 그 어떤 마찰열도 기꺼이 감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내 안의 붉은 불씨를 안고, 타인들이 기다리고 있는 다채로운 세계를 향해 힘차게 발걸음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