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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이에 Apr 12. 2019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곳, 씨네큐브에서 변화를 경험하다

광화문으로 가는 평일 오전의 버스는 비어 있었다. 얼었던 날씨가 좀 풀렸기 때문일까. 고개를 숙여 핸드폰을 보고 있는 승객보다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그 가운데 있던 나 역시 자연스럽게 창으로 눈길을 주었다. 버스의 속도에 맞춰 도심의 풍경이 지나갔다. 풍경을 눈에 담을 수 있는 여유와 적당한 일조량에 기분이 나른해졌다.     

겨울의 끝 무렵, 친구와 만나기 위해 광화문 씨네큐브를 찾았다. 씨네큐브가 위치한 흥국생명 빌딩 앞에는 대형 조형물이 여전히 망치질을 하고 있었다. ‘해머링 맨’은 미국의 조나단 브로프스키의 작품으로 망치질하는 모습을 통해 노동의 가치를 표현하고 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주말과 공휴일, 근로자의 날에는 작동하지 않는다. 무려 22m에 달하는 조형물은 세계 11개 도시에 설치됐는데, 서울에는 2002년 7번째로 세워졌다. 그리고 해머링 맨이 설치되기 2년 전, 2000년 12월 빌딩 지하에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단관 예술영화관, 씨네큐브가 개관했다. 빌딩 1층에 들어서자 로비부터 지하 2층에 위치한 극장에 이르기까지 예술적 감각을 느끼게 해줄 다양한 조형물과 그림이 전시해 있었다. 극장으로 내려가면 상영하고 있는 영화의 포스터들이 눈에 띄었다. 보기로 한 영화 <가버나움>의 포스터를 잠시 바라보았다. 어린아이의 옆모습. 제목은 무슨 뜻일까.    

극장에 도착한 것은 약속시간보다 30분 이른 시각이었다. 씨네큐브의 시간은 느리게 흘렀다. 상영을 기다리는 관람객은 거의 없었다. 몇 명 있던 관람객들은 혼자 온 듯 했다. 친구가 오기 전 표를 구매했다. 똑같은 유니폼에 머리스타일, 매뉴얼을 갖춘 말투를 쓰는 매표소 직원이 아니어서 좋았다. 친구의 늦어진다는 연락을 받고 상영관 한쪽에 마련된 소파에 앉았다. 평소 같으면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했을 법한데, 괜찮았다. 아무 생각 없이 있어도 그대로 좋았다. 영화를 보기 전부터 이미 여유롭고 지적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고등학생 때는 예술영화를 보는 것이 고상한 취미라 여겼다. 씨네큐브에서 주최한 영화 강의를 들으며 평론가의 어려운 영화해석을 이해하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이던 때가 생각났다. 무성영화를 보며 졸린 눈꺼풀에 힘을 주어 자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던, 영화를 꿈꾸던 시절이 생각났다. 한동안 방문하지 못했지만 내게 씨네큐브는 한결같이 그 자리에 있는 단골 극장 같은 곳이었다. 

영화 상영시간이 가까워서 친구를 만났다. 안부 인사는 잠시 미뤄두고 상영관 안으로 들어갔다. 광고도 팝콘도 없는 조용한 극장에서 정시에 영화가 시작됐다.

<가버나움>은 성경에 등장하는 기적과 저주를 동시에 받은 마을의 이름이다. 레바논의 출생신고서의 기록도 없는 12살 소년, 자인이 자신을 태어나게 했다며 부모를 고소하는 내용이었다. 영화는 무책임한 부모 때문에 희생당한 아이들과 불법체류자의 삶을 소년의 시선으로 보여주었다. 무거운 소재와 더불어 참담한 배경이었지만 주인공 아이의 영민함 때문일까. 아주 조금은 희망적으로 느껴졌다. 감독은 혼돈의 안갯속에서 작은 기적들이 일어난다는 뜻으로 제목을 지었다고 했다.    

영화를 보고 며칠이 지났을 때, 퇴근 길 버스에서 친구의 메시지를 받았다. 유엔난민기구와 함께 난민보호에 동참하겠습니다! 라는 문구의 후원신청서 사진이었다. ‘오늘 걸어 다니다가 낚였지만, 기꺼이 낚였다, 내 행동의 동기는 <가버나움>이었다.’라고 했다. 영화가 자신으로 하여금 무언가 해야 하게끔 권했다고 덧붙였다. 나는 영화가 사회적 기능을 했다고 답했다. 쉽게 대답은 했지만 사회적이란 단어의 무게가 느껴졌다. 

늦은 밤, 퇴근하는 사람들을 태운 버스는 가득 찼다. 해머링맨은 망치질을 멈췄을까. 친구의 연락은 가버나움의 곤궁한 주인공의 마음과 씨네큐브가 갖는 여유로운 감정을 동시에 불러왔다. 고르지 않은 기분으로 버스 밖 풍경을 바라보았다.     

모든 영화가 사회적 기능이나 역할을 생각하며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그럴 필요나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의미의 중점을 둔 영화가 예상치 못한 큰 울림을 선사할 때가 있다. 영화로 인해 누군가의 사소한 생각이 변할 수도 있다. 그 작은 행동이 세상의 큰 변화를 가져올지도 모를 일이다. 또한 이런 변화의 경험은 반복되는 일상에 지칠 때마다 씨네큐브를 찾는 이유이기도 하다.      

   

❚극장 정보. 

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새문안로68 흥국생명빌딩 지하2층.

찾아가기 광화문역(5호선) 6번 출구 도보 10분. 

전화 02-2002-7770~1

상영정보 www.cinecube.co.kr

주차 건물 내 주차가능, 영화관람시 3시간 무료.     


글 : 엉덩이로 글쓰기 2기 정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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