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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이에 Apr 12. 2019

때늦은 골목길 순례

written by 남선희

도둑질을 배웠다. 도둑질을 '배웠다'고 하니 잘못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그렇다. 그 시절, 딸기 향 바나나 향 나는 지워지지 않는 지우개들과 매주 한 번씩은 다른 모양으로 출시되는 귀여운 수첩들을 비용 지급 없이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그런데 그때의 내 소행이 타고난 능력의 결과물이라거나 성실한 노력의 성과라고 한다면 좀 거친 어린아이를 떠올릴 것 같아 두려워 '배웠다'고 하겠다.

실은 배웠다. 변명을 늘어놓자면 마포 국민학교 1학년 2반 김양희가 내게 지시를 내렸고, 난 따랐다. 양희는 내가 모르는 많은 놀이를 주도하는 창조자이자 안내자였다. 동네 아이들에게 이 역할과 저 역할을 짝지어 주는 대장이었다. 그래서 그 아이의 눈 밖에 나는 것은 좀처럼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무서웠다

일곱 살의 실력이라 봤자 수족관 수초 보듯이 빤한 것. 몇 번 성사시키지 못하고 들통 나버렸다. 등굣길에 들른 문방구에서 식은땀을 흘리며 사냥감을 거머쥔 나를 학생 문방구 할아버지가 문방구 안쪽으로 부르셨다. 그리곤 나의 소행이 잘못된 행동이며 담임 선생님과 부모님께 알려지면 크게 혼나게 될 것이라고 엄포를 내리셨다. 나는 그 자리에서 양희의 이름을 불거나 하진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실 양희는 그 문방구 옆집 문방구 막내딸이었다.

그날 아침 이후, 그 아이는 내 맘속에서 몹쓸 친구가 되었다. 이후에 내가 그 아이와 계속 골목 친구였던가 아니었던가…. 기억에서 지워졌다. 어쨌든 난 어리고 어리석었다.

오늘의 여행은 그곳이었다. 우리 집이 있었던 마포구 도화 2동 가든호텔 근처에서 마포 초등학교가 있는 도화 1동까지 걸었다. 미세먼지와 초미세먼지 모두 ‘좋음’이었으며 이른 봄의 일요일 늦은 오후는 짧은 걷기 여행을 하기에 최적이었다.

고백하건데 도둑질한 기억을 되새김질하고 반성할 계획은 없었다. 다만, 나의 고향을 방문해 백종원 삼대천왕으로 유명해진 떡볶이집이 나의 유년 시절 역사와 함께했음을 사진으로 남겨 증명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부모님과 선생님께서 끝내 알 수 없었던 불미스러운 내 과거는 제거되지 않은 흉터로 마른 햇살 아래 또렷하게 널려 있었다.

1학년이 끝나고 2학년이 되던 때인가 고학년이 되어서인가 풍문에 의하면 ‘스마일 문방구’ 할아버지와 할머니께서는 그 가게의 주인이 아니라고 했다. 다른 사람이 주인이라고 했다. 그 변명 많은 사건으로 들르지 못하고 다른 문구점을 전전하며 준비물을 사는 동안 이사를 하신 것이다. 주인어른이 바뀐 이후로 난 면죄부를 받은 것처럼 양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학교 앞 골목을 누비고 다녔다.

오늘 방문한 마포 초등학교 앞 ‘스마일 문방구’는 ‘스마일 문구점’으로 상호명을 바꾸어 건재했다. 가게 앞에서 잠시 서성거렸다. 일곱 살 어린이에게는 꽤 넓어 조심조심 건너던 골목은 대여섯 걸음이면 충분히 반대편 보도로 갈 수 있었다. 심장이 콩콩거렸다. 할아버지께서 성큼 나오셔서 "오 너구나! 그때 고 녀석!"하고 나를 알아보실 것만 같았다. 앞머리를 축 늘어뜨리고 가게 여기저기를 곁눈질했다. 
 
 

"뭐 찾아요? 뭐 사려고 하는데?" 이 대사가 서너 차례 반복되었다. 

"아, 네. 제가 마포 초등학교 졸업생이어서 오랜만에 들러 보았습니다." 
 
 

어르신은 내게 몇 살이냐 언제 졸업을 했느냐 묻기 시작하셨다. 다시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문초의 시간 같았다. 나는 조심스럽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어르신은 내가 당신의 딸내미보다 3년 선배라고 하셨다. 이렇게 시작된 담소는 마포구 도화동 일대의 문방구 근황으로 이어졌다. 우리 집 바로 앞 샛별 문방구 아줌마는 몇 년 전 암으로 돌아가시고 여든이 넘으신 바깥 어르신이 문방구를 돌보신다고 했다. 당신은 40년이 넘게 문구점을 지키고 있으며 10년 전에 현재 3층 건물을 지어 올리셨다고도 했다.

주인아줌마는 밖에 내어놓은 장난감과 소위 불량식품 진열대로 나가셔서 다른 손님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셨다. 그동안 나는 슬며시 가게 안으로 들어가 어린 꼬마들을 설레게 하는 어린 나를 유혹했던 수많은 물건을 둘러보았다. 가게 안쪽 귀퉁이에선 뒤통수 불룩 나온 TV가 켜진 채로 가게를 지키고 있었다

자신의 평생을 ‘골목 안 풍경’에 매달린 사진가 김기찬 선생님의 책 <골목 안 풍경 전집>에서 읽은 글귀가 떠오른다. 나는 유난히도 골목을 좋아해 이 사진집을 침대 머리맡에 두고 피곤한 늦은 밤에 읽곤 한다.


  “어느 날 골목이 쥐 죽은 듯 고요했다. 밖에 나다니는 사람 하나 없는 날은 외롭고 쓸쓸했다. 이런 날은 산등성이를 타고 만리동, 공덕동, 도화동까지 오르락내리락하며 돌아다녔다. 행촌동에서 처음 만난 분은 근심스러운 얼굴로 병든 강아지에게 숟가락으로 밥을 떠먹이고 있던 아주머니였다. 비 오는 날 추녀 밑에 비를 피하며 서 있던 소년의 쓸쓸한 모습, 가파른 돌계단을 지팡이에 의지하며 내려오던 노인…. 눈을 감지 않아도 눈앞에 어른거리는 생생한 풍경들이다

어느새 골목 안 아이들은 어른이 되었고, 어른들은 노인이 되었다. 여든세 살 기와장이 윤 노인도 이제는 세상에 없다. 세월만 간다고 투덜거렸는데 세월만 간 것이 아니었다. 1980년 중반부터 시작한 재개발 사업은 공덕동으로 번지고, 인왕산 및 행촌동으로 건너뛰었다. 1997년, 결국은 중림동도 그 운명을 다했다. 높다란 아파트가 들어섰고, 그곳에 살던 골목 안 사람들은 모두 어디론가 흩어져 버렸다. 골목은 내 평생의 테마라고 했는데 내 평생보다 골목이 먼저 끝났으니 이제 골목 안 풍경도 끝을 내지 않을 수가 없다. 

사진가 김기찬”

문방구에서 떠나 천천히 학교로 향했다. 도둑질해도 이르지 않는 골목과 실수투성이 아이를 쫓아내지 않은 학교 운동장에서 어린 남자아이들이 축구를 한다며 술래잡기를 한다며 소란스레 뛰어놀고 있었고 웃음소리는 메아리처럼 끊이지 않았다.

용산 성당으로 가자. 난 도화동과 공덕동, 산천동을 따뜻한 시선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있는 그곳으로 다시 느릿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 엉덩이로 글쓰기 2기 퇴고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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