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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이지 Oct 21. 2020

우리 과연 계속 같이 살 수 있을까

모두에게 미안한 밤

 


   

카레의 모든 물건들 중에서 가장 비싼 물건인 캣타워는, 주문 제작 가구라 받는 데까지 꽤 시간이 걸렸다. 카레가 우리 집에 오고 나서도 5일 정도가 지나서야 비워 둔 거실의 구석 자리가 채워졌다. 다행히 기사님이 직접 설치까지 해 주셔서 우리는 굉장히 편했다. 물론, 집 전체를 울리는 드릴 소리에 카레는 또 겁을 잔뜩 먹은 채로 방 안에서 덜덜 떨고 있었지만 말이다.


캣타워가 설치된 후 일주일이 지나도 캣타워 주인이 사용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조금 아쉽긴 했지만 앞서 말했듯 어느 정도 예상했던 상황이었기에 놀랍지는 않았다. 50만원에서 천 원이 빠진 어마어마한 가격의 책장형 캣타워는 우리 집 거실에 맞춤 제작한 것처럼 컬러감이나 디자인이 잘 어울렸다. 가지고 있던 책들 중 표지가 예쁜 것들을 모아 올려두니 흡족한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밋밋했던 거실에 포인트가 되는 가구였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의 힘인가? 캣타워의 진짜 주인은 별 관심 없었지만 그나마 집사들이라도 만족스러워서 다행이었다. 


50만원에서 천 원이 빠진 어마어마한 가격의 캣타워. 아주 만족스럽다




냉장고 사건 이후로 우리는 카레가 또 다시 경계 모드로 돌아갈까 걱정했다. 하지만 카레는 아기 고양이라서인지 그런 일들은 금세 잊은 듯했다. 자기 전 안방 침대에 누워 남편과 휴대폰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들어 보니 카레가 안방에 들어와 화장대 위를 탐험하고 있었다. 우리가 있는 공간에 카레가 자진해서 먼저 들어온 일은 처음이었다. 물론 금방 다시 나가 버렸지만, 카레의 귀여운 도발에 우리는 얼떨떨하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카레가 우리와도, 이 공간과도 많이 편해졌다는 증거였다. 다행히 남편 또한 카레와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직도 많이 경계하고, 조금만 놀라도 바로 방으로 도망가버리곤 했지만 그래도 장난감을 멀찍이서 열심히 흔들어주면 관심을 보였다.


자려고 하는데 갑자기 들어와 화장대 위를 휘리릭 훑고 돌아간 카레. 귀엽다


그렇게 남편과 번갈아 가며 장난감을 흔들던 어느 저녁, 입양 담당자분께 갑작스러운 연락을 받았다. 카레의 형제묘 중 가장 먼저 입양을 간 봄이가 구토를 했는데, 회충이 나왔다는 소식이었다. 뜻밖의 소식에 마음이 덜컹 내려 앉았다. 입양 담당자님은 아이를 병원에 데려갈 필요 없이, 병원에서 회충약만 타다가 며칠 동안 먹이면 된다고 말씀하셨다. 그나마 아이를 병원에 데려가지는 않아도 된다는 사실은 다행이었지만, 며칠 전까지 카레와 함께 지냈던 봄이에게 회충이 나왔다면 카레에게도 회충이 있을 게 뻔했다. 마음이 급해졌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나는 바로 근처의 동물병원으로 향했다.


버스를 타고 동네의 한 24시간 동물병원에 도착해, 카레의 이름으로 접수를 하고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5분 정도 대기를 한 후 카레의 이름이 불려졌다. 당연히 약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나에게, 직원은 지금까지 한 번도 아이를 데리고 이 병원에 방문한 적이 없다면 회충약을 처방해 줄 수 없다고 말했다. 아니, 그럼 미리 말을 해줘야지, 왜 기다리게 만든 거야? 화가 났지만 거기서 그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바로 근처에 있는 또 다른 동물병원을 검색해 전화를 했다. 다행히 그 병원에서는 회충약을 줄 수 있다고 했지만, 시간이 늦었던지라 곧 문을 닫는 시간이었다. 나는 엄청난 속도로 뛰어 결국 문이 닫히기 1분 전 겨우 약을 받을 수 있었다. 퇴근 시간이 임박한 직원은 내 손에 약을 쥐어 주며 빠른 속도로 이야기를 쏟아냈다. 대충 “3개월에 한 번씩 먹이면 되고, 회충이 있다면 소면처럼 나올 거에요!” 라는 내용인 것 같았다.


요 며칠 사이 카레의 경계심이 조금 덜해지긴 했지만 아직까지 가까이 가지는 못했기에, 알약을 직접 먹일 수는 없었다. 음식에 가루약을 섞어 먹이는 게 지금으로선 최선이었다. 그럴 줄 알고 집에서 나오기 전, 일부러 카레에게 밥을 주지 않았다. 아마 지금 쯤 많이 배고픈 상태일 테니 음식에 섞어 먹이면 잘 먹을 거라고 생각하며 집에 돌아왔다. 사실 혹시 모르니 남편에게 카레 밥을 주지 말고 있으라고 말해두고 싶었지만, 평소에는 아침을 제외하면 내가 늘 카레의 밥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돌아온 나에게 남편은 카레가 배고파 하는 것 같아 사료를 주었다고 했다. 그것도 내가 원래 주던 양보다 더 많이. 내 성격상 생각했던 대로 일이 착착 진행되지 않고 중간에 이렇게 돌발 상황이 발생하면 나는 당황하고 화가 난다. 내가 늘 카레의 밥 양을 체크하고 있는 걸 잘 알면서, 하필이면 왜 오늘 마음대로 준 거야? 혼자 땀 흘리며 열심히 병원을 뛰어다녀 약을 얻어 왔는데! 하지만 남편은 죄가 없었다. 그냥 원래 지금 쯤 카레가 저녁을 먹는 시간이었고 내가 약을 사러 갔으니, 자신이 대신 카레의 밥을 챙겨준 것일 뿐이었다. 걱정되는 부분을 미리 말하지 않은 내 잘못이지, 일이 일어나고 나서 탓하는 건 아무 소용이 없었다.


방금 밥을 먹은 카레는 별로 배고파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타온 약은 빨리 먹여야 했다. 집에 있던 습식 캔을 하나 뜯어 가루약을 잘 섞은 다음, 그릇에 담아 조심스레 카레의 방 앞에 두었다. 만약 카레가 먹지 않는다면 약을 버리는 셈이 되고, 그렇다면 오늘 내가 병원에 다녀온 일들은 다 무용지물이 되는 거였다. 하지만 내가 했던 노력 같은 것들은 사실 아무 상관이 없었다. 나는 그저 카레의 뱃속에 있을 회충들에 대한 걱정뿐이었다. 카레를 위해서도, 우리를 위해서도 하루라도 빨리 조치를 취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다행히 카레는 처음 꺼내 준 습식 캔에 관심을 보였고, 방금 밥을 먹은 것 치고는 꽤 잘 먹었다. 하지만 역시나 양이 많았는지 다 먹지는 못했다. 습식 사료는 또 금방 상한다고 하길래 어쩔 수 없이 남긴 것은 그냥 버리기로 했다. 그래도 일단은 약을 먹였으니 된 거겠지? 불안했지만 지금은 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검색해 보니 고양이에게 회충이 나올 경우 쓰던 화장실 모래를 모두 버려야 하는 것은 물론, 이불이나 담요 등도 모두 세탁해야 한다고 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배변에 회충 알이 있을 수도 있어 잘못하면 사람에게도 옮거나 고양이도 다시 옮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만약 진짜 회충이 나오면 해야 할 일들을 머리 속으로 되뇌이며 나는 밤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뒤척였다.




다음 날 아침, 아무래도 어제 병원에서 설명을 제대로 못 들은 게 걸려 병원에 다시 전화를 했다. 최근까지 같이 지냈던 형제묘에게서 회충이 나왔다고 하자, 역시나 카레에게도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병원에서는 아무래도 아이를 데리고 내원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다. 어차피 카레의 3차 접종 시기도 지났던 터라, 하루 빨리 병원에 방문해야 하긴 했다. 원래는 카레가 좀 더 적응하고 우리와 친해지면 병원에 데려가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당장 방문해서 필요한 조치들을 취하고, 전체적으로 검진도 한 번 받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내가 이렇게 말하니 남편도 함께 마음이 급해져, 바로 오후 반차를 쓰고 집에 온다고 했다.


어제 급하게 회충약을 받아왔던 병원은 알고 보니 우리 동네에서 엄청나게 유명한 병원이었다. 친절하고 가격도 저렴해 병원 이름만 검색해봐도 커뮤니티에서 난리였다. 대부분의 동물병원은 강아지는 잘 보지만 고양이는 잘 못 보는 경우도 있다고 하는데, 이 병원은 강아지는 물론 고양이까지 정말 잘 봐 주신다고 소문이 나 있었다. 하지만 그래서인지 늘 대기가 많은 병원이었다. 심지어는 전화 예약도 되지 않았다. 미리 보호자가 먼저 직접 병원에 가서 방문 예약을 해 두거나, 아니면 아이와 병원에서 몇 시간이고 계속 기다려야 하는 방법 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어제 회충약을 주지 않았던 그 24시간 병원으로는 다시 가고 싶지 않았다. 퇴근 시간이였음에도 끝까지 약을 챙겨 주었던 이 병원으로 꼭 방문하고 싶었던 나는 미리 병원에 방문해 방문 예약을 한 후 반차를 쓰고 온 남편과 만나 집으로 돌아왔다.


카레와 완전 경계 상태는 지났지만, 아직까지 눈 인사와 멀찍이서 장난감을 흔들어 주는 것을 제외하고는 더 이상의 진전은 없는 상태였기에 솔직히 우리는 카레를 잡아 이동장에 넣을 자신이 없었다. 입양 담당자님께 카레를 병원에 데려갈 예정이라고 말씀드리니 혹시 모르는 상황에 대비해 장갑을 준비하라고 하셨다. 보호소에서도 아이들을 병원에 데려가거나 입양을 보낼 때, 이동장에 옮기는 게 엄청나게 힘들었다고 한다. 몇 시간동안 못 잡을 때도 있고, 온 몸을 다 할퀴거나 무는 경우도 있었다고. 그 이야기를 들으니 두려움은 더 커졌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언젠가는 해야 하는 일이었다. 우리는 모든 준비를 한 후 카레의 방에 들어가 방문을 닫았다. 그리고 심호흡을 했다. 둘 다 용기가 나지 않아 한참을 망설인 끝에, 카레를 구석으로 몰았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마음이 약한 남편은 한 번에 잡지를 못했고, 그 사이 이미 카레는 겁을 잔뜩 먹은 상태로 그르렁거리고 있었다. 카레가 그러면 그럴수록 우리도 더 두려워졌다. 우리가 우물쭈물 하는 사이, 도망가고 공격할 준비가 이미 된 카레는 우리가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바로 발버둥을 치며 도망쳤고, 다시 잡으려 할 때마다 방 전체를 돌아다니며 날뛰었다. 카레는 공포에 질려 자신이 발휘할 수 있는 최대한의 힘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내가 잡아보려 했지만 남편은 자기도 이렇게 무서운데, 겁 많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있겠냐며 말렸다. 나는 카레가 도망 다니는 곳으로 이리 저리 이동장만 옮겨 댈 수 밖에 없었다.


몇 십분 동안 노력했지만 전혀 진전이 없었다. 상황만 더 악화될 뿐이었다. 카레는 심하게 겁을 먹은 나머지 도망가다가 방 한 가운데 오줌을 쌌고, 남편은 장갑을 끼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카레에게 양 손 여러 군데를 물렸다. 고무장갑이나 일반 천 장갑으로 되는 게 아니었다. 알고 보니 이럴 때 사용할 수 있는 아주 두껍고 튼튼한 안전장갑이 있었다. 남편이 끼고 있던 얇디 얇은 장갑은 다 찢어지고 말았고 손에서는 피가 뚝뚝 흘렀다. 카레가 작정하고 도망가면서 방 안을 날뛰고 공격하는데 우리 둘 다 너무 깜짝 놀랐다. 공포에 질린 카레의 모습은 야생 고양이 그 자체였다. 며칠 전 나와 눈인사를 했던 카레는 그 곳에 없었다. 병원에 데려가기는 커녕 우리는 카레에게 손가락 하나도 댈 수 없었다.




우리는 결국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엉망이 된 방을 치우고 다시 방 문을 닫고 나오는데 남편에게도, 카레에게도 미안한 마음밖에 들지 않았다. 병원을 가야 하는 상황이긴 했지만, 당장 안 간다고 죽는 것도 아니었는데 괜히 내 욕심으로 이런 상황을 만들어버린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난 이렇게 항상 내가 꽂히면 바로 해야하는 스타일이었다. 나 혼자 할 수 있는 일이면 상관 없지만, 항상 남편까지 끌어 들여서 이런 상황을 만든다. 그냥 좀 천천히 기다릴 걸. 늘 그렇듯이 돌이킬 수 없는 상황까지 간 뒤에야 후회하는 나였다.


카레는 너무 놀란 나머지 다시 구석으로 들어가 버렸고, 우리의 관계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듯 했다. 카레의 야생성을 본 우리는 솔직히 너무 무서웠다. 카레에게 너무나 미안한 마음이지만, ‘우리가 과연 이 아이랑 계속 살 수 있을까’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과연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수 있을까. 나아진다는 보장이 있으면 모르겠는데, 아까 봤던 카레의 모습으로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아이를 다시 보내서는 절대 안 된다는 생각은 여전했지만, 우리가 병원 하나도 못 데려가는데 이 아이를 끝까지 책임질 수가 있을까. 1년 동안 고양이에 대한 유튜브란 유튜브는 다 보고, 블로그와 카페까지 읽어볼 수 있는 글은 다 읽었지만 이런 케이스가 있다고는 들어본 적도 없었다. 고양이를 키우는 지인들도 많았지만 모두들 별 문제가 없다고 했다. 이런 상황까지 생길 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우리는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남편 또한 화가 많이 났다. 남편이 카레에게 물렸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심하게 물린 줄 몰랐기에 남편을 걱정하기보다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먼저 이야기하기 바빴기 때문이었다. 병원에 가는 것도 오늘 가지 않으면 카레가 당장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었는데, 내 고집으로 밀고 나간 것이었다. 알고 보니 남편의 상처는 엄청나게 깊었고 피가 뚝뚝 흘렀다. 그냥 살짝 물린 거라고 생각했던 나는 무척이나 당황했다. 검색해 보니 고양이에게 심하게 물렸을 경우 병원에 바로 가 주사를 맞고 약을 먹어야 한다고 했다. 남편에게 병원에 같이 가 준다고 했지만, 남편은 자신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며 혼자 간다고 거절했다. 화가 난 남편의 모습은 너무나도 차가웠다.




그렇게 한 바탕 소동이 지나간 집은 이상하리만큼 너무나도 조용했다. 거실 한 가운데 혼자 앉아 있는데 여러 감정이 뒤섞여 계속 눈물이 흘렀다. 나는 장문의 카톡을 통해 우리의 상황을 보호소 입양 담당자분께 설명드렸다. 보호소에서는 충분히 이해한다고 하셨고 어떤 결정을 내리던 존중해주신다고 하셨다.


모두에게 너무나 미안한 밤이었다.




유튜브에서도 카레와의 일상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카레의 현재 모습이 궁금하시다면 여기를 확인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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