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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이지 Oct 20. 2020

새벽에 들려온 엄청난 소리들의 정체

초보 집사의 하루

 



카레가 온 지 일주일이 되었지만 아직까지 큰 변화는 없었다. 카레는 여전히 우리가 집에 없거나 밤에 자고 있을 때만 거실로 조심스레 나와 이곳저곳을 탐험했다.


카레가 온 후 처음으로 남편과 함께 긴 외출을 하는 날이었다. 친구들과 저녁 내내 놀다가 늦은 밤 집에 들어가는데, 왠지 카레가 방에서 나와 있을 것 같았다.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했다. 우리가 들어오는 소리에 카레가 바로 방으로 숨어버릴 수 없도록 번호키를 재빨리 누르고 들어가 보기로 했다.


초스피드로 집에 들어간 우리가 작은 방을 살펴보니 역시나 카레는 그곳에 없었다. 한참을 조심스럽게 집 안을 훑어본 후에야, 안방 화장대 밑에 숨은 카레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면 그렇지! 우리가 없는 동안 또 신나게 돌아다녔구나! 우리는 들킬까 봐 조마조마하고 있는 카레를 센스 있게 모른 척해주었다. 한 삼십 분 정도 지났을까,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는데 카레가 조심스레 안방에서 빠져나와 작은 방으로 다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아직까지 카레가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카레의 물건들은 여전히 모두 작은 방에 있었다. 하지만 카레가 우리가 없으면 조금씩 나오기도 하고, 이제 일주일 정도 되었으니 물건들을 하나씩 빼 보면 어떨까 싶었다. 카레의 밥그릇을 방 문 밖으로 살짝 빼 두고, 우리는 카레의 시선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모른 척하고 있었다. 한참 동안 눈치를 보던 카레는 조심스레 나와 밥을 조금씩 먹기 시작했다. 아직 많이 무서울 텐데 용기를 낸 카레가 진심으로 기특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오늘 조금 더 가까워지면 어떨까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카레와 조금이나마 친해질 수 있을까 싶어, 저녁마다 장난감을 열심히 흔들어 보았지만 카레는 방 안에 숨어있을 뿐 별 반응이 없었다. 장난감에 대한 흥미보다 두려움과 경계심이 아직까지는 더 컸던 카레였다. 하지만 밥도 방 문 밖에서 먹는 걸 보니, 오늘은 왠지 카레가 좀 더 다가올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침 이 날 만났던 티봉이 집사 친구가 고양이들이 환장한다는 ‘카샤카샤’라는 장난감을 선물해 주었다. 과연 이게 카레에게도 통할까?


거실 소파 끝에 앉아서 팔을 뻗어 옆쪽으로 장난감을 흔들었다. 그렇게 하면 카레에게 우리는 안 보이고 장난감만 보이기에 카레가 좀 더 편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한참 동안 장난감을 흔들자 카레가 조금씩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카레는 장난감에 정신이 팔렸다가도 금세 화들짝 놀라 방으로 도망가고, 또다시 와서 정신이 팔려 있다가 달아나는 것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해치지 않는다고!) 우리는 카레를 밝은 데서 가까이 본 게 처음이었기에 고개를 돌려 카레를 직접 눈으로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분명 고개를 살짝이라도 돌리면 바로 방으로 달아나 다시 나오지 않을 것이 뻔했기에 그렇게 하지 못했다. 소파에 앉은 채 고개는 정면으로 하고, 휴대폰 카메라를 옆 쪽으로 비춰 카레의 모습을 휴대폰으로 대신 확인했다. 장난감에 넋이 나가 장난감이 움직이는 대로 고개를 왔다 갔다 하는 카레는 정말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어느새 카레가 소파 바로 옆까지 왔다는 것을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역시 고양이가 환장한다는 장난감은 달랐다!



고개는 돌린 채 카메라 렌즈로만 확인하는 카레의 모습. 장난감에 정신이 팔렸다가도 괜히 눈치를 보며 도망간다



얼마 후 남편은 먼저 자러 안방으로 들어갔다. 왠지 1:1이면 카레가 좀 더 편할 것 같다는 생각에 이번에는 소파에서 나와 거실 끝에서 장난감을 흔들어 보았다. 아직 많이 경계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래도 내 모습이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카레는 조금씩 가까이 와서 장난감을 가지고 놀기 시작했다. 물론 나와 2미터 이내로 가까워지면 화들짝 놀라 달아나고, 내가 아주 조금이라도 움직여도 다시 도망갔지만 이것도 엄청난 발전이었다! 나는 정말로 감격스러웠다.


그렇게 카레와 놀아준 지 몇 시간, 카레는 이제 다 놀았는지 방문 뒤에서 빼꼼 고개를 내민 채로 엎드려 있었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나는 움직임을 최소화하고, 혹시 움직이더라도 카레가 놀라지 않게 매우 천천히 행동했다. 자신을 위해 내내 조심스럽게 행동하고 있는 나를 알아본 건지, 오늘 조금씩 함께 놀면서 두려움이 조금 사라진 것인지, 카레는 처음으로 나를 경계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지 않고 있었다.


처음으로 편하게 쉬고 있는 카레. 감격스럽다


이것만으로도 오늘은 충분했다. 하지만 힘들게 찾아온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실패하더라도 더 해보자! 카레에게 거실 끝 멀리서 깜박, 깜박하면서 눈인사를 했다. 그동안에는 아무리 카레에게 눈을 깜박거려도, 무서워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털을 세우거나 하악질만 하던 카레였다. 그런데, 내가 깜박, 깜박 하자 카레의 눈도 천천히 감기는 게 아닌가! ‘깜박, 깜박.’ ‘깜박, 깜박.’ 잘못 봤나 싶어 다시 해봐도 카레는 진짜 내 눈을 쳐다보며 깜박 깜박 눈을 계속 감았다 떴다. 이런 날이 오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이런 느낌은 생전 처음이었다. 아이가 태어나서 나를 보고 눈 맞추며 웃을 때 이것과 비슷한 느낌인 걸까? 처음으로 내 눈인사를 받아 준 카레에게 너무나 고마웠다. 잠든 남편을 깨워 빨리 자랑하고 싶었다. “나 카레랑 눈인사 했다!”




그렇게 카레와의 첫 눈인사에 나는 너무나도 기쁜 마음으로 잠에 들었다. 이론으로만 알던 고양이와 친해지는 과정을 실제로 겪어보니 감격 그 자체였다. 마음이 풍요로워진다는 게 이런 느낌인 걸까?


하지만 그 느낌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 날 새벽, 거실에서 우당탕탕 하는 소리가 여러 번 들렸다. 자던 우리는 계속 뒤척이다가, 마지막으로 난 엄청나게 큰 소리에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거실로 나왔다. 방에서 카레를 찾는데 카레가 없었다. 소리가 무척이나 컸기에 걱정이 되긴 했지만, 며칠 전 소동에서 얻은 교훈으로 카레가 어딘가에 또 숨어있을 것임을 우리는 알았다. 물론 어제 나와 멀리서 눈인사를 하긴 했지만 아직 카레는 긴장을 다 푼 상태가 아니었다. 또 남편과는 아예 교감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찾는다고 해서 나올 카레가 아니었다. 우리가 다시 방으로 들어가고 나서야 나올 것이 분명했다. 꼭두새벽이었기에 우리는 별 걱정 없이 다시 방으로 들어가 잠을 잤다.


그러나 우리의 예상은 빗나갔다. 아침이 되었는데도 카레는 여전히 방에 없었다. 도대체 이게 또 무슨 일이지? 저번처럼 패닉 상태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당연히 방에 돌아와 있을 거라 생각했기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얼마나 찾았을까, 이번에는 냉장고와 벽 사이 구석 공간에 카레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사실 이 공간은 우리가 카레를 데려오기 전, 집 전체를 체크하면서 왠지 카레가 들어갈 것 같다는 생각을 했던 공간이었다. 우리 집의 경우 냉장고를 세워두는 자리의 안쪽 공간이 파여 있었다. 냉장고 문 쪽은 벽과 냉장고 사이 공간이 좁은 편이었지만, 중간부터 끝까지는 한쪽에 뻥 뚫린 공간이 있는 것이다. 냉장고의 열 때문에 이렇게 빈 공간을 만들어 두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아직 6개월밖에 되지 않은 카레의 몸집으로는 좁은 틈의 입구로 충분히 들어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못 들어가게끔 미리 틈의 입구에 큰 액자를 세워 놓았던 것이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들어간 거지? 안 쪽 깊숙한 구석에 쭈그린 채로 앉아 있는 카레는 뒷모습과 꼬리만 겨우 확인할 수 있을 정도였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카레는 먼저 냉장고 위에 올라가, 냉장고 옆에 있는 이 엄청나게 매력적인 공간을 발견한 후 호기심에 냉장고를 타고 그곳으로 내려간 것이라고 추정되었다. 남편이 아침에 일어났을 때 가끔 카레가 냉장고 위에 있던 것을 발견했다고 했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였다. 


우리는 어젯밤 큰 소리의 정체가 카레가 냉장고에서 내려오면서 떨어져 난 소리라고 생각했다. 카레를 찾기 전까지는 ‘어딘가에 있겠지’라는 생각에 별 걱정이 없었지만 막상 찾고 나니 다쳤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갑자기 마음이 급해졌다. 카레를 나오게 하기 위해 액자를 빼고, 입구 앞에 츄르를 짠 그릇을 둔 채로 안방에 들어가 조용히 있었다. 하지만 카레는 몇십 분이 지나도 나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다시 거실로 나가 아무리 조심스럽게 카레를 불러도 카레는 뒷모습만 보인 채 구석에서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우리가 아직 무서워서 꼼짝도 안 하고 숨어있는 것인지, 아니면 진짜 다리라도 부러졌거나 크게 다쳐서 움직이지 못하는 것인지 우리는 알 수가 없었다. 만약 다친 게 아니라면 언젠가는 나올 테니 별 걱정이 없지만, 다쳤으면 당장 병원에 데려가야 하니 큰일이었다.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냉장고를 움직이는 것뿐. 남편이 냉장고를 앞으로 당겨 카레가 나올 수 있는 공간을 넓게 만들어 주었다. 냉장고를 움직이는 큰 소리와 우리의 낯선 움직임에 또 엄청나게 놀란 카레는 공포에 질린 상태로 작은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다행히 카메라로 살펴본 카레의 움직임에는 큰 문제가 없어 보였다. 다친 게 아니라 정말 다행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또 한 번 마음을 쓸어내렸다.


우여곡절 끝에 방으로 무사히 돌아온 카레. 배고팠는지 허겁지겁 밥을 먹고 있다...ㅠㅠ


그런데 카레가 뛰어나온 공간을 자세히 보니, 냉장고와 벽 사이 틈에 있는 벽지가 여기저기 찢겨 있었다. 사실 어제 엄청 큰 소리가 들린 것은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이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카레는 그 공간을 발견하고 거기로 내려갔지만 틈 입구가 액자로 막혀 있어 다시 나올 수가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벽을 타고 다시 냉장고 위로 올라가려고 여러 번 시도했고 벽이 찢기도록 노력했지만 중력의 힘을 이길 수가 없었던 거다. 그래서 올라가다가 몇 번이나 다시 바닥으로 떨어졌고, 마지막으로 심하게 떨어진 큰 소리를 우리가 들은 게 아닐까. 여러 번 바닥으로 떨어진 카레는 새벽에 우리가 갑자기 나와 자기를 찾는 소리가 들리자 또 무서워서 소리도 못 내고 그냥 포기하고 그 안에서 잠들어버린 거였다. 


미리 액자로 막아 둔 냉장고와 벽 사이 틈. 이 액자 때문에 결국 카레는 나오지 못했다


냉장고와 벽 사이에 카레가 힘들게 노력했던 흔적이 남아있다. 마음이 아프다


정말 너무나 안타까웠다. 왜 자꾸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우리는 너무나도 속이 상했다. 카레가 그 공간에 들어갈 것이라고 미리 예상해서 액자를 세워놓았는데 결국 그 액자가 카레를 못 나오게 하다니. 다치지는 않은 듯 해 다행이었지만, 몇 번을 그렇게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얼마나 아팠을까 생각하자 카레에게 너무나 미안해졌다. 물론 고양이가 주방 카운터를 밟고 냉장고 위로 올라가, 그 높은 데에서 내려갈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하지만 조금만 더 주의 깊게 생각했다면 냉장고 위 공간까지도 미리 막아둘 수 있었을 텐데. 그랬다면 이런 일이 벌어지진 않았을 텐데. 나는 나를 자책했다.


나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타고난 불안한 성향 때문에, 어떤 일을 시작하기 전에 혹시라도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상황까지 생각한다. 그리고 그 일이 일어나지 못하게 미리 대비해 두어야 직성이 풀린다. 하지만 만약 ‘에이, 그것까지 하는 건 오바야’ 하면서 마음에 걸리는 상황을 그냥 넘긴 후에,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날 경우 나는 다시 ‘왜 내가 그때 그것까지 하지 못했을까’ 하고 자책을 한다. 예민한 사람의 종특인 걸까? 이래도 유난, 저래도 유난이다.


그래도 카레가 다친 곳이 없다는 것만으로 감사해야 했다. 이제 우리에겐 마지막으로 할 일이 남았다. 카레가 그 공간에 다시는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일이었다. 아마 트라우마가 생겨 다시 들어가지 않을 것 같긴 했지만, 고양이는 영역 동물이라 한 번 들어간 곳에는 또다시 들어갈 가능성이 있었다. 냉장고 위에 아예 못 올라가게 하고 싶었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우리는 안 보는 책들과 다이소에서 사 온 네트망 등을 이용해 뻥 뚫린 공간으로 향하는 냉장고 위의 틈을 막아 두었다. 냉장고와 벽 사이도 조금 더 좁혀 놓고, 이번엔 액자를 두 개나 끼워 두어 그 공간으로는 절대 못 들어가게 만들어 놓았다.


이제는 완벽하게 막아둔 문제의 그 틈


카레는 그 이후로도 여러 번 냉장고에 올라가긴 했지만 그 구석으로 다시 내려갈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오히려 우리가 책과 네트망 등으로 잘 막아두고, 그 자리에 방석까지 깔아주어 훨씬 더 편안하고 아늑해 보였다. 거실을 가로질러 이용해야 하는 캣타워보다, 자신이 안전하다고 느끼는 작은 방에 더 가까운 냉장고가 카레에겐 더 좋은 캣타워였다.


초보 집사 두 명과 초보 집냥이의 우당탕탕 하루가 또 이렇게 지나간다.




유튜브에서도 카레와의 일상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카레의 현재 모습이 궁금하시다면 여기를 확인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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